땅콩 단상
땅콩은 콩이다. 콩과 식물인데 밤, 호두, 잣 같은 견과류의 일부로 아는 이들이 적지 않다. 생긴 것과 먹는 법과 맛이 그들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금 관심을 갖고 살펴보면 겉만 비슷할 뿐 출신성분이 다른 것을 알게 된다.
견과류는 말 그대로 껍질이 단단 견고하다. 나무에서 자라 열매를 맺는다. 땅콩은 대두나 완두처럼 껍질이 비교적 부드럽고 밭에서 키우는 밭작물이다. 다만 다른 콩들과 달리 땅속에서 열리기 때문에 땅콩이다. 땅콩은, 땅과 콩이 합쳐진 순우리말 명칭이다. 수많은 이름들의 어원 중에서 가장 명쾌하고 근본적이며 귀엽게 지어진 이름이라고 나는 단언한다.
땅콩은 귀여운 이름 때문인지 비유로도 흔히 쓰인다. 작고 단단한 이들을 땅콩으로 부르고(자그마한 체구로 세계를 제패했던 김미현 골퍼가 대표적이다), 단칸방에 칸만 나눠 쓰는 작은집들을 땅콩집으로 비유하기도 한다. 가령, 오래된 영화 중에 ‘땅콩껍질 속의 연가’라는 작품이 있었다. (연인이 아닌) 두 남녀가 한 방에서 살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됐는데, 중간에 커튼막이로 영역을 구분하고 불편 미묘하게 사는 이야기였다.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데 제목이 남아 있는 이유 역시 땅콩의 힘 같다.
심심풀이 땅콩이라는 말도 심심찮게 쓰인다. 안줏거리로 인기가 많고 주연보다는 조연에 충실한 속성,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특징 때문이다. 정월대보름 부럼 목록에 밤, 호두, 잣들 속 꼭 땅콩을 끼어주는 호강도 알고 보면 값이 싸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심심풀이 땅콩이다.
우리나라도 왠지 땅콩 같다. 작은 나라가 두 동강으로 나뉘어 있고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은 고소하고 단단하며 제각각 따로 논다(위기 때만 뭉친다)는 점에서 그렇다. 모든 콩이 그렇듯이 척박한 땅에서 잘 자라고 지력을 회복시키는 능력도 닮은꼴이다. 옥수수를 재배해 식량을 확보하고 난 뒤 쇠약해진 지력을 회복시키기 위해 땅콩을 심는 곳도 많다. 이리저리 비싼 대우 못 받으면서도 지구의 소금 역할을 하는, 콩은 콩이다.
우리나라 땅콩은 제주도 우도와 경기도 여주가 주산지로 유명하다.
하지만 우리가 먹는 땅콩들의 태반은 미국산과 중국산이다. 수입산에 비해 3배 이상 높은 가격을 감내하기가 쉽지 않은 탓이다. 그래서 산지에서는 땅콩을 이용한 각종 가공식품들을 만든다. 땅콩막걸리, 땅콩빵, 땅콩음료, 땅콩과자 같은 것들로 부가가치를 높이려는 것이다.
가까운 곳에서 자란 것보다 머나먼 대륙에서 운임 들여 건네온 것의 가격이 훨씬 낮은 이유는 물량 때문이다. 대량생산, 대량운송, 대량거래의 힘이다.
대량의 힘이 무서운 세상은 당분간 끝나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땅콩을 닮은 이 나라 사람들은 뭔가 돌파구를 찾아내리라 믿는다. 같은 땅콩이라도 다른 땅콩으로서의 가치를 찾든가, 엉뚱한 분야와 결합해 땅콩 이상의 땅콩을 만들든가 하는 저력을 기대한다. 요즘 K-푸드가 위세를 떨치고 있는 배경도 사실은 그런 저력에서 비롯된 것 아닐까 싶다.
불확실하고, 혼란스럽고, 답답한 시대를 지나며 땅콩의 입장을 헤아려 봤다. 은근히 기력을 되찾는 느낌, 지력이나 기력이나 모두 땅에서 나오고 땅으로 돌아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