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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다시 갈 곳을 찾아야 한다.

- 고난의 유럽 여행기 9편

by 이해의선물 Jan 31. 2025


뉘른베르크에서는 나쁘지 않았다.

늦은 밤 도착한 뉘른베르크의 에어비앤비는 런던보다 더 저렴했지만

신축 호텔이라 정말 호텔에 숙박하는 느낌이 났다.

다섯 번의 유럽 여행에서 처음으로 호텔다운 호텔에서 묵는 것이었다.


아홉시간의 기차 이동 끝에 도착하기도 했고

다음 날 살인적인 더위에 치여 뉘른베르크만 가볍게 걸었다(물론 이 날도 2만보를 넘겼다.)



이제 다음 목적지를 정해야 했다. 

나는 뉘른베르크를 떠나는 전전날까지도  가야 할 다음 목적지를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이와 여행하면서 내일 밤을 자고 일어나  갈 곳, 잘 곳을 모른다는 것은

낯선 도시에서 엄마의 손을 놓쳐 길 잃은 전쟁통의 미아와  다름 없었다. 

내 집이 어딘지 몰라 길에 서서 울고 있는 아이를 만나 '집이 어디니'라고 물어도 답을 못하는 아이,

울다 울다 눈물 자국이 얼굴과 손등에 쩔었어도 그 누구에게도 도움을 구할 수 없는 아이가 나였다.


예정된 목적지는 베네치아였으므로 가야 할 방향은 남쪽이어야 했다.

베네치아로 가는 루트 안에 있으면서 아이와 볼거리가 있는 도시여야 했다.

구글 지도를 열어 찾은 도시는 세 곳.


인스부르크, 볼차노, 베로나였다.


인스부르크는 조용한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갈 수 있는 알프스가 있었고, 걷기에 좋았으며, 

스와로브스키 박물관이 있었다. 그러나 숙박비가 예상 이상으로 비쌌다.

볼차노에는 무엇이 있는지 내가 잘 모르는 곳이었고, 숙박비 역시 아주 비쌌다.

베로나는 아이와 한 번 다녀온 기억이 있는 도시라 익숙했지만 하루에 이동하기에는 이동거리가 너무 멀었다.



어디로 가야 하나...또 다시 암전 속의 뻘밭을 걸었고, 나침반과 오아시스 없는 사막을 걷는 밤이었다.

갈 수 있는, 아니 가야 할 곳은 볼차노였는데 가격이 저렴한 숙소가 지도에서 꽤 외곽이다.

주인에게 물어보니 버스로 15분이 걸린다고 한다.


지도를 몇 시간이나 들여다보면서

틈틈이 볼차노에 무엇이 있고, 어디를 갈 수 있는지를 알아본다.

볼차노에는 오르티세이 마을에서 갈 수 있는 알프스가 있고, 소프라볼차노 케이블카로 올라가는 포도밭이 있다.

그리고 맛있어 뵈는 맥주집을 한 곳 찾았지만 여전히 새벽이 가까워지도록 숙소를 결정하지 못했다.


그 때, 

기적처럼 보이지 않던 숙소가 나타났다.

가격이 볼차노 숙소가 맞나 싶을 정도로 저렴한 에어비앤비인데 볼차노 기차역 바로 앞이다.

이럴수가. 주인에게 물어보고 말 것도 없이 바로 예약을 질렀다.

그런데...


브런치 글 이미지 1


이 때가 새벽 다섯 시

밖이 환해져오고 있었고 잠을 얼마나 잤는지 기억이 없을 정도로 눈은 아프고 시렸다.


카드가 한도 부족이란다. 

뻘밭을 걷던 다리가 늪으로 빨려들어가 몸통까지 차 오르는 뻘에 폐부가 조여 답답했고, 

타는 목을 움켜쥐고 사막을 걷던 몸은 뜨겁고 따가운 불볕에 신음하며 쓰러지는 듯 했다.

이 카드는 별로 사용할 계획이 없던 카드라 한도를 아주 적게 설정해 놓았던 카드였고

하필 재발급 받은 카드가 이 카드였다. 

다시 예상도, 상상도 하지 못한 절망이었다.


어떡하지.


오늘은 아침부터 서둘러 로텐부르크와 밤베르크를 다녀와야 하는 날이다.

일단 날이 밝았기에 아이를 깨워 씻는 동안 몇 개 남지 않은

햇반을 꺼내 데우고,  컵라면에 끓는 물을 붓는다. 다행히 아직 김치는 세 봉지가 남았다.

나는 전날 사다 즉석 둔 파스타를 먹었는데 짜고 느끼하고, 온갖 저렴하고 좋지 않은 재료들이

마구 몸속으로 들어오는 느낌인데 먹을 것을 가릴 처지가 아니라

그냥 우걱우걱 씹어 삼켰다.



기차를 타고 로텐부르크로 가는 길.

아내에게 도움을 청했다.

아내 카드를 받아 입력하고 인증번호를 받아 등록하고 결제를 시도한다.


된다.


하...  이렇게 또 한 고비가 넘어가는구나.

카드 어플을 열어 즉시 결제를 눌러 절반을 입금하니 다시 카드 한도에 여유가 생겼다.

유심이 바뀌면 카드 결제는 안 되는데 입금과 결제 시스템은 잘 작동했다. 

참 선택적이구나. 카드값은 잘 받아주는구나. 싶었다.


브런치 글 이미지 2



뉘른베르크를 떠나 볼차노로 가는 날 아침

7시에 마트가 문 여는 것을 확인하고 눈 뜨자마자 씻지도 않고 그대로 나갔다.

다섯 시간 넘게 여유 없이 이동해야 하므로 아이가 먹을 

요거트, 킨더초콜릿, 과자, 체리와 방울토마토를 샀다.

체리는 무려 1kg을 샀다. 


체리와 토마토, 포도 등 네 가지가 나란히 있었고 어느 것이 체리 가격인지 알 수 없었다.

옆에 있는 한 사람을 붙잡고 무엇이 체리 가격이 적힌 종이인지 물었지만

내 뜻은 전달되지 않았다.

이른 아침 꾸죄죄한 동양인이 무얼 물어보니 신기했나보다. 그럴법 했다.

내가 묵은 지역은 관광지도 아니고 현지인들 동네이고, 현지인들이 오는 동네 할인마트 같은 곳이었기에.

순식간에 주변으로 세 사람이 몰려 들었고 서로 말을 주고 받더니

한 젊은 백인 청년이 손으로 가리키며 저것이 체리라고 알려주었고 나는 의심했다.

체리 1Kg 가격이 진짜 2.29유로라고???


정말이었다. '이런 대박 가격을 보았나' 하는 기쁜 마음으로

숙소에 돌아와 아침을 먹고 기차에서 먹을 맥주 한 병을 냉동고에 넣어두었으며

체리와 방울토마토는 씻어 팩에 담아 침대 아래에 두었다.


나는 아이에게 "체리랑 방울 토마토만 네가 챙겨" 했고 

아이는 나에게 "뭐 잊어버린거 없나 확인 한 번 더 해 봐" 했다.


"걱정 마" 하며 한 바퀴 둘러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지하철 정거장 사이의 거리가 매우 짧은 두 정거장을 지나 

뉘른베르크 중앙역에 도착해 뮌헨으로 가는 이체에 탑승했다. 

이제 정말 고난 같은 건 없을 것이기에 안도의 한숨과 함께 아이에게 

"체리 꺼내 먹어" 했고 나는 시원한 맥주 한 병을 찾았다.


그러나 

나에게는 맥주가 없었고

아이에게는 방울토마토와 체리가 없었다.


이 고난 유럽 여행의 마지막 체리였고 

이어지는 고난은 두고 온 체리의 아쉬움을 느낄틈마저 주지 않았다.


-10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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