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한 년'의 기원

by 김윤담

엄마는 늘 내게 말했다. 넌 너무 딱딱하고, 차갑고, 독하다고.

그러면서 이어지는 신세한탄의 말들, 지겹게 들었던 "서방 복 없는 년은 자식 복도 없다더니.."로 시작하는 레퍼토리.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는 것 말고는 그 말들을 소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내겐 없었으니 분하고, 억울하고, 동정받고 싶은 감정으로 가득한 그녀 앞에서 그저 멍한 표정으로 우두커니 앉아만 있는 내가 엄마는 딱딱하게만 보였을까.


그랬을 수도 있겠다.


내가 6학년 때 아버지는 집을 나갔다. 어느 날 갑자기 트로트 가수가 되겠노라고 선언한 뒤부터 외박이 잦아졌는데 실은 다른 살림을 차린 거였고, 엄마는 심부름 업체를 통해 그 사실을 알았다.


이후 늘 반복되던 부모의 싸움을 뜯어말리던 내게 아버지는 "독한 년"이라는 한 마디를 남기고 그 길로 떠났다.




내 기억의 시작점에서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살가운 적 없었던 아버지가 사라지자 난 편했다. 늘 좁은 거실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누워 물 떠 와라, 리모컨 가져와라, 라면 끓여와라 심부름시키는 이가 없어졌으니 말이다. (어린 시절 입술에 아토피가 심해 늘 긁어서, 입 주면엔 진물과 딱지가 덮여 있었는데 거울을 보고 네 얼굴이 얼마나 이상한지 감상평을 써오라던 아버지였다. 실제로 꼬깃한 쪽지에 내 입술은 거북이 등껍질, 공룡이나 괴물과 같다고 적어 검사를 받았었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가 있는 집의 탁하고 무거운 공기가 늘 싫었는데 이제라도 잘 됐다 싶었다.


후련함도 잠시, 얼마 뒤 엄마가 암 진단을 받았다. 직장암이었다. 처음엔 1기라고 했는데, 며칠 뒤 림프에 전이가 돼 3기라는 연락이 왔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울었는데 그때 그 눈물이 엄마에 대한 가여움 때문인지, 기댈 곳이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검색창에 직장암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다 생존율, 사망률이라는 낯선 단어와 막막한 수치들 앞에서 그냥 나는 벌벌 떨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수술 날짜가 잡히고, 나는 병원에서 엄마와 내내 함께 지냈다. 긴장한 모습의 엄마가 수술실로 들어갔다가 퉁퉁 부은 얼굴로 코에 호스를 달고 나왔을 때, 낯선 모습이 무서웠다.


엄마가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집으로 갈 수 있을까. 다행히도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나 2주가 지난 다음 퇴원했다.


그 사이 나는 중학생이 되었고, 다시 돌아온 일상에 익숙해질 무렵, 여느 때처럼 하교하고 현관문을 열었을 때, 남자 구두가 신발장 앞에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벙 찐 표정으로 엄마를 올려다봤을 때, 엄마는 멋쩍은 듯 웃음기를 머금은 표정으로 "들어와"라고 말했다.


직감적으로 알았다.
그 신발의 주인이 아버지라는 걸.


그 길로 문을 쾅 닫고 달려 나와 독서실로 갔다. 종잇장 넘어가는 소리만 들리는 어두 컴컴한 칸막이 안에서 나는 숨죽여 눈물만 뚝뚝 흘렸다.


그렇게 아버지가 다시 돌아왔다.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버지는 심하게 말을 더듬고, 전과는 달리 완전히 무력하고 비굴해 보이기까지 한 모습으로 다시 좁은 거실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나 너무 싫어. 아빠가 다시 집에 있는 거 너무 싫어."라고 얘기했을 때, 엄마는 아버지가 필요하다고 했다.


몸도 마음도 약해져 있는 엄마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없었다. 그저 꾸역꾸역 방구석에 틀어박혀 또 소리 없이 눈물만 쥐어짜 내는 것 말고는.


그땐 내 마음이 어떤 상태인지 스스로를 돌아볼 여유도, 투정 부릴 힘도 없었다. 위태로운 엄마를 앞에 두고 불평하는 일은 사치라고 생각했다.




집에서 나를 제외한 세 사람은 그럭저럭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는 듯싶었다. 원래도 남동생이라면 엄마건 아버지건 끔찍했으니 셋만 따로 제주도로 여행도 다녀올 정도였다. 철딱서니 없는 동생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바뀐 생활에 잘 적응했는데 난 그런 모습마저도 꼴 보기 싫었다.


동생은 엄마의 상황에 대해 무관심했고, 가정을 파탄 낸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았다. 어쨌든 사랑을 받고 자란 존재의 천진함이랄까. 그런 게 난 못 견디게 증오스러웠다. 아직 다 회복되지 않은 몸으로 출근하는 엄마에게 동생은 자전거를 사달라며 졸랐고, 엄마는 그 투정을 들어주기 위해 더 열심히 일했다.


난 엄마에게 문제집 값 달라고 하는 것조차 죄스러웠고, 내게 몇만 원을 건넬 때마다 한숨을 푹푹 쉬던 엄마였는데…. 두 사람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쨌든 내가 할 수 있는 건 조용히 분노를 삭이는 일뿐이었다.


그렇게 나는 이 식구들 사이에서 철저하게 외딴섬이 되기로 했다. 차라리 그게 편했다. 학교에 가면 명랑하게 친구들과 어울렸고, 집에 돌아오면 다시 돌덩이처럼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흐느낌 없는 눈물을 떨구면서 일기를 썼다.




그렇게 지난한 생활도 잠시, 아버지는 다시 외박을 하기 시작했고, 이번에는 돈까지 요구하면서 나는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엄마 좀 그만 힘들게 하라고, 제발 나가 달라고, 제발 괴롭히지 말아 달라고 말하는 내게 이번에 아버지는 "독사 같은 년"이라는 말을 남기고 집을 떠났다.


그때 내 팔을 어찌나 세게 움켜잡으면서 말했는지 팔 안쪽 살이 다 파여나갈 지경이었다. 아버지가 집을 나가고 나서 분홍색 속살이 드러난 상처를 보고 또 봤더랬다.


그때 내 나이 14살, 그때는 그 상처만 아물으면 다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했었다.




아버지가 사라진 일상은 이상하리만치 똑같았다. 학교에 가고,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문방구에서 500원짜리 햄버거를 사 먹고, 유행하는 인터넷 소설을 읽으며 울고 웃었다. 사실은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이 집에서의 시간보다 더 즐거웠다.


아침 일찍 일어나 학교에 제일 먼저 갔다. 교무실에서 반 열쇠를 꺼내 불 꺼진 교실에 가장 먼저 발 디디는 아이가 바로 나였다. 텅 빈 교실에 엎드려 졸다가 친구들이 오면 기지개를 켜고, 하루를 시작했다.


내가 성인이 되고 난 뒤 어느 날 엄마가 말했다.


"난 너 중, 고등학교 때 생각이 하나도 안나. 너 어떻게 학교 다녔니?" 그리고 “난 그때 말이야”라는 말로 본인의 기구한 인생사를 다시 한번 읊기 시작했다.


역시 그 질문에는 나에 대한 측은함 보다는 그 시절 바쁘게 살아야만 했던 본인에 대한 가여움이 더 크게 묻어났다.


사는 게 바빠서, 일하느라 그런 거니 원망할 수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난 괜찮았다. 괜찮은 줄 알았다.


그때의 나는 내 처지와 상황에 대해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고, 그저 하루하루를 별 탈 없이 마무리하는 것에 안도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 상황을 마음을 직시할 힘조차도 없어서였던 것 같지만.




내 마음이 엄마 말대로 딱딱해지기 시작한 건 되려 어른이 되고 난 이후였다.


그때, 아버지가 다시 집에 돌아오기 전에 내게 한 번만 귀띔을 해줬다면, 설명해줬더라면 내가 좀 덜 힘들었을까.


내 학창 시절이 떠오르지 않는다며 어떻게 학교를 다녔냐는 질문 속에 아주 약간의 흔들리는 눈빛, 미안함이라도 스쳤으면 좀 나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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