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아버지를 원망조차 하지 않을까
엄마를 미워하지 못한 채 자란 아이가 30대가 되어서야 엄마를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그 마음이 부끄러워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말들을 여기에 적습니다.
나의 브런치 작가 소개에 적은 글귀다.
내 인생의 반은 엄마를 가여워하는데 소비했고, 나머지 반의 반은 엄마를 원망하는데 소비했다. 그리고 나머지 반의 반쯤은 엄마로부터 멀어지는데 소비했다. 그런데 아버지의 존재는 어디로 갔을까.
가정에 충실하지 않았고, 자식에게 정서적 학대를 가했고, 불륜을 저질렀으며, 어디에선가 끝내 아프고 초라한 모습으로 늙어가고 있을 나의 아버지.
한 집에 살 때는 숨소리도 듣기 싫었던 나의 아버지.
그리하여 남몰래 숨죽여 증오하며 저주했던 나의 아버지.
어째서일까. 지금의 나는 그를 원망하지 않는다.
어느 날 그가 내 인생에서 감쪽같이 사라진 이후부턴 그저 홀가분한 마음 뿐이었다. 그의 빈 자리는 도려낸 종양과도 같아서 속시원하기만 했다. 도려낸 종양을 그리워하는 사람은 없을테니까.
아버지가 집을 나간 건 중학교 2학년 즈음이었다. 그전까지는 좁은 집의 거인 같은 존재였다. 집에서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TV앞에 누워서 보냈다. 리모컨을 찾거나 물을 마시는 정도의 일도 누운 채 나에게 시켰다.
키 185cm를 자랑하던 그는 인물 역시 훤칠한 편이었고, 사교적이었으며, 대부분의 사람에게 친절했다. 사무실로 배달온 다방 레지 언니 엉덩이를 한 손에 움켜쥘 만큼.
그는 웃상이라 군생활 내내 웃지 말라고 선임으로부터 괴롭힘을 당했다고 고백할 만큼 유순한 인상의 사람이었지만 딸인 나에게는 그 웃음을 쉽게 보이지 않았다.
엄마는 그가 내게 유독 불친절한 이유를 '네가 기대 이하로 생겨서 실망했기 때문'이라고 농담처럼 말한 적이 있다. 나의 엄마와 아버지는 외모적으로 나무랄 데 없는 사람들이었다. 초등학교 학부모 수업 때 엄마가 오면 친구들은 엄마의 미모를 보고 감탄하곤 했다. 그런데 넌 왜 그래?라는 질문도 함께 날아와 가슴에 박혔다.
엄마가 나를 임신했을 때 아버지는 '우리 애는 정말 예쁠 거야. 그거 만큼은 자신 있어.'라고 단언했단다.
내겐 생일이 1달 차이 나는 고종사촌 언니가 있는데 아이를 낳고 보니 뽀얗고 눈도 동글하고 또렷하게 생긴 사촌과 달리 나는 너무 까맣고 눈도 작고, 코도 낮고 못생겨서 많이 당황했었노라고, 부모님은 농담인 듯 진심이 가득 배어나는 말들을 뱉어내곤 했다.
아버지는 나를 자주 '호박'이라고 불렀다. 내가 흘겨보면 '예쁜 호박'이라고 했지만 둘러댄 것임을 당연히 알 수밖에.
어느 날에는 가족 동반 모임에 남동생만 데리고 간 적이 있었는데, 돌아온 아버지에게 나는 왜 안 데려갔느냐고 묻자 "너 못생겨서"라고 농담인양 비웃듯 말했던 때도 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전신 거울 앞에 서 스스로를 바라보던 나는 '그렇구나'라고 생각했다.
어느 날엔 무슨 일이었는지 아버지와 함께 시장을 거닐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날 왜인지 손을 잡고 걸었다. 그때 멋쩍으면서도 내심 좋았던 기분을 기억한다. 못난 내 손을 잡고 나란히 걸어주는 아버지가 감동적이었달까. 몇 안 되는 기억의 조각 중 그 장면만은 콩닥이던 가슴의 촉각까지 선명하다. 외모에 대한 지적을 수시로 듣고 자란 데다 크면서는 살까지 부쩍 붙어 학창 시절 내내 외모콤플렉스가 심해 마음고생도 많았더랬다.
아버지는 허세가 심한 편으로 늘 자신의 형편보다 나아보이기 위해 치장하는데 열심이었다. 때가 되면 새 차를 뽑고, 말끔하게 양복을 차려입고 집을 나섰다. 사업한다는 핑계로 고교 동문회, 지역 로터리회 등 다양한 모임에 참석했으며 무대가 있는 곳이라면 빼지 않고 올라가 나훈아의 '영영'을 애절하게 불렀다.
그의 허세만큼 사업도 잘 풀렸다면 좋았겠지만 그와는 정 반대였고, 집은 날로 가난해졌다. 가난해질수록 엄마와 아버지가 싸우는 날도 많아졌다. 고성으로 절규하는 엄마와 그런 엄마를 외면하는 아버지를 방문 틈 사이로 지켜보다 잠드는 날도 많았다.
어느 날에는 부부싸움을 심하게 한 뒤 엄마가 밤에 현관문을 열어주지 않자, 아버지는 통로에서 문을 두드리며 온갖 쌍욕을 퍼부어댔다. 바로 위층엔 같은 반 친구가 살고 있었다.
트로트 가수로 새 인생을 살겠다던 아버지는 외박이 잦아지더니 다른 살림을 차렸다. 엄마는 그 집을 찾아가 문 앞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벽돌로 차를 부쉈다고 했다. 아버지는 그 여자가 자신의 엄마 같아서 좋았다고 했다나. 그 미모에 웬 전형적인 아줌마 같은 여자랑 바람난 남편이 괘씸해 치를 떨다 엄마는 결국 암에 걸렸다.
아버지는 더 이상 엄마를 괴롭히지 말고 우리 집에서 제발 좀 사라져 달라는 나의 절규를 듣다 못해 내 팔을 움켜쥔 채 '독사 같은 년'이라는 말을 남기곤 겨드랑이 살도 움푹 패갔다.
그날 아버지를 향한 분노를 삭이느라 입술을 너무 꽉 깨문 나머지 아랫입술이 이빨 모양대로 파였지만 살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차올랐고, 당장 눈앞에 보이지 않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은 옅어져 갔다.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채 살아가야 했던 엄마, 나, 남동생 그 불균형한 가정 안에서 나는 오히려 엄마와 불화하며 지냈다. 전쟁 이후 국민들의 내분이 더 격해지는 것처럼 나의 분노는 가정파탄의 원인을 제공한 아버지보다 그 과정에서 나르시시스트적인 면모를 무한히 뿜어내는 엄마에게 더 질려버린 것이다.
엄마가 회색의 염증처럼 내 심장을 파고들었다면 아버지는 내게 검은색 레고블록 같았다. 깔끔하게 떼어내서 완전히 분리할 수 있는 종류의 어떤 것 말이다.
지난 수년간 엄마에 대한 복잡한 감정을 글로 풀어내고, 감정을 정리하고 나니 '아버지'라는 존재에 대한 아이러니가 슬며시 고개를 든다.
그동안 나는 왜 아버지를 원망조차 하지 않았을까. 어쩜 그렇게 철저히 묻어둔 채 마치 없는 존재처럼 여기고 살 수 있었을까.
엄마가 자신과 딸을 동일시해서 나를 철저히 감정쓰레기통으로 삼았듯, 나 또한 엄마와 나를 동일시해서 그토록 원망의 에너지를 쏟았던 것일까.
너무 오래전 접어둔 책장 속 페이지처럼 내게 아버지의 존재는 아주 희미하다.
지금부터는 그 감정을 들여다봐야 할 때가 다가온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