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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윤담 Mar 20. 2024

어째서 아버지에겐 아무 기대도 없었던 걸까

토로나 회한 아닌 마주보기

'아버지'라는 단어는 공익광고 속에 등장하는 화목한 가족 구성원 중 가장 키가 크고, 포근한 니트를 입은채 화사한 미소를 짓고 있는 남성정도의 이미지로 다가온다. 불행히도 내게 그런 아버지는 없다. 

나에게 아버지란 어떤 의미였을까. 돌이켜봐도 그 단어엔 어떤 온기도 느껴지지 않는다. 

'아버지'의 존재가 내가 속했던 가정의 파탄 원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감정적으로 배제되어 왔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중학교 때 아버지가 집을 나간 이후 나르시시스트 성향이 다분한 엄마와 한 집에서 사는 일은 아버지가 있을 때와는 또 다른 불행이었다. 당장 눈앞에 보이지 않는 무책임한 아버지를 미워할 여력도 내겐 없었다. 눈앞에 있는 가여운 인생을 짊어진 엄마가 날 너무나 괴롭혔으니까. 


날 괴롭히는 엄마가 정신적 성격적 결함이 있는 나르시시스트일지언정 먹여주고 재워주기는 한다는 사실이, 그 집에서 하숙생처럼 눈치 보며 지내야 한다는 사실이 날 미치게 하기도 했다. 하지만 한걸음 물러나 바라보면 진짜로 나빴던 건 아버지와 그의 일가친척들이었다. 

그가 떠난 뒤 폐허에 남겨진 우리는 서로를 미워하느라 그의 존재를 점점 더 잊어갔다.


장기하 '그때 그 노래'라는 곡의 가사 중 이런 구절이 있다. 

'예쁜 물감으로 여러 번 덧칠했을 뿐인데 어느새 다 덮여버렸구나 하며 웃었는데 알고 보니 나는 오래된 예배당 천장을 죄다 덮어야 하는 페인트 장이였구나.'

그 가사가 지금의 내 상황과 똑 닮아있다. 

엄마를 생에서 밀어내느라 온 힘을 쏟고 났더니, 이젠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희미하게나마 다시 올라오다니..


분명한 건 내 속에서 부유하는 것들이 아버지에 관한 감정이 아니라 의문이라는 점이다. 

어째서 꾸역꾸역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끄집어내 보는 지금에도 그에게는 분노의 감정조차 남아있지 않는 건지. 

어찌 됐든 엄마의 나르시시스트적인 면모에 가려져 면죄 아닌 면죄를 받고 있던 아버지에 대한 존재를 내 안에서 다시 정비해야 할 때인 것만은 분명하다. 


온전히 엄마에게로 쏠렸던 내 감정에 대한 힌트는 꽤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 나의 딸에게서 얻는다. 

불화 없는 가정 속에서의 딸도 남편보다 엄마인 내게 훨씬 더 많은 것을 기대하고 요구한다. 

절대적으로 보내는 시간이 많아서일까. 동성이라서 그런 걸까. 


회사 일 때문에 야근과 출장이 잦은 아빠가 1번이고 매일 붙어지내는 엄마는 2번이라면서도 슬금슬금 눈치를 살피고, 사랑표현은 내게 많이 갈구한다. 아빠보다 나의 행동에서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을 보면 모녀사이의 구조적 특성에 의한 본능적인 반응인 건지 궁금하기도 하다. 분야에 지식이 없으니 탐구해 봐야 일이다. 


다시금 지난 가정사를 돋보기로 살피듯 돌아보는 것은 토로나 회한이 아니라 마주 보기이다. 이제는 내 과거를 온전히 마주 볼 힘이 생겼음에 감사하다. 지금껏 참 씩씩하게 잘 지나왔노라고 스스로를 도닥여보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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