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족지연'에 익숙한 아이로 키우기
어쩐지 가난해진 것 같은 요즘이다. 장 보러 가서 자그마한 사과 몇 알이 든 봉지를 들었다 놨다, 돌아섰다가 겨우 카트에 담았다. 애호박 값은 또 왜 이리 올랐는지, 4000원에 육박하는 금액을 보고 놀라 얼른 내려놨다. 만만하던 바나나도 한 송이에 5천 원대.. 한우를 산 것도 아니고 고작 야채와 식료품 몇 가지 골랐을 뿐인데 삑삑 대는 바코드 리듬에 맞춰 숫자는 속절없이 올라갔다.
아이가 초등학생이 되면서 한 달에 지출해야 하는 비용도 훅 늘었다. 방과후수업과 수영, 태권도, 피아노 등 예체능 학원비에 이런저런 교육 구독서비스 등등.. 본격적인 공부 관련 학습은 시작하지 않았는데도 드는 비용이 만만찮다. 새해가 되면서 남편의 월급도 올랐지만 치솟는 물가 때문에 전혀 체감되지 않는다.
남편은 회사생활에서 여러모로 중요한 시기를 지나고 있다. 자신의 역할을 잘 해내는 것에서 나아가 조직을 관리하는 역할까지 책임이 늘어나 몸과 마음 모두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일도 많은데 회식도 잦고, 이런저런 연수 스케줄까지 동분서주 중이다. 어느 때보다 열심인데도 빠듯해지는 살림에 생각이 많아진다. 소비를 많이 하거나 아이에게 크게 투자하는 편이 아닌데도 시절은 우리에게 야박한 듯하다.
우리 가족은 편의점에 자주 가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아이에게 '편의점'은 듣기만 해도 설레는 단어이다. 칭찬할만한 일이 있거나, 격려가 필요한 순간에 가는 곳이기 때문이다. 아주 어릴 때부터 입에 단 것은 언제나 보상이 필요한 순간에만 주어지도록 유도해 왔다. 그래서인지 아이는 단 것을 당연한 것이 아니라 공손한 태도로 얻어내야 하는 무엇으로 인식하는 듯하다. 엄마가 너무 정 없는 것 아니냐고 하는 이도 있겠지만 나는 이러한 환경이 디폴트로 설정되어 있는 게 아이의 성장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믿는다. 집에는 아이스크림이나 과자 등은 결코 대량구매해두지 않는다. 적절한 때에 딱 한 번 먹을 만큼만 사서 선물처럼 귀하게 즐긴다. 어떤 날 선심 쓰듯 "오늘 편의점 갈까?" 물으면 아이 얼굴에는 해사한 미소가 퍼진다. "오예"하며 펄쩍펄쩍 뛰기도 한다. 아직 초등학교 1학년이기에 가능한 반응이리라.
월급쟁이 남편과 프리랜서 아내의 수입으로 인플레이션 시국을 버텨내려면 허리띠를 졸라매는 것이 당연하기도 하겠지만 그런 형편 때문에 편의점에 자주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나름 계산된 고도의 육아관이 바탕에 깔려있다. 아이가 너무 풍족한 환경에 도취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다.
먹을거리도, 장난감도, 물건들도 넘쳐나는 세상이다. 가진 돈이 많지 않아도 편의점에서 아이스크림이나 음료를 사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아직 달콤함이 세상 제일의 가치인 아이에게 간단하고 유해한 기쁨의 맛을 쉽게 들이게 하고 싶진 않다.
부모의 월급은 유한한데 아이들은 신용카드 한 장이면 먹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을 다 가질 수 있다고 믿는다. 생활용품을 사러 다이소에 들러도 아이는 천 원짜리 장난감을 졸라 얻어내고, 금방 잃어버리고, 잊어버린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사주신 티니핑 병원 세트도 거대한 박스를 뜯고 나면 조악한 플라스틱 덩어리들 일뿐 언박싱의 기쁨은 금세 사그라든다.
소비는 언제나 너무 쉽고 짜릿하다. 금방 싫증 나고 더 큰 욕구를 부르는 '소비의 행복'은 되도록 아이에게 가장 늦게 알려주고픈 가치였다. 삶에서 느끼는 행복이란 그리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니까.. 갖기 위해 노력하고, 기다리는 방법을 먼저 일러주고 싶었다. 내가 나의 부모에게 간절히 바랐던 것이 경제적인 윤택함이 아니었기에 아이를 향한 무조건적인 물량공세의 유혹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아이가 원하는 것은 뜯고 나면 금방 지루해지는 장난감상자가 아니라 따뜻한 눈빛이나 목소리, 함께하는 시간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살아보니 달콤한 것, 빛나는 것은 원하는 만큼 손에 쥘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우린 모두 알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가능하다면 물질에 현혹되는 시기를 늦추고 싶었다. 그게 궁극적으로 아이가 더 행복해질 수 있는 방향이라고 믿었다. 나중에 육아서를 보니 전문가들은 나의 이런 생각을 '만족지연'이라는 용어로 표현했다. 막연히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삶의 태도가 학술적으로 검증된 내용이었다니 신기하고 뿌듯했더랬다.
'만족지연'은 요즘을 살아가는 내게도 꼭 필요한 가치이다. 비교대상이 너무 많은 세상이기에 불시에 밀려드는 상대적인 박탈감과 우울감의 파도에서 중심을 잘 잡아야만 했다. 좋고, 멋진 것을 알아보는 안목과 실용적으로 살아내야 하는 현실의 괴리에서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마음이 먼저 가난해지기 쉬웠다.
그럴 때면 가족을 돌아봤다. 옆구리만 쿡 찔러도 깔깔깔 웃음이 터지는 세 사람이 있었다. 선선한 저녁 산책끝에 편의점에서 산 맥주 한 캔, 아이스크림 하나로도 충분한 우리가 있었다. 조금 더 가난해진다 해도 포기하지 않을 사랑이었다.
며칠 전 친구집에 놀러 갔던 아이가 '햄버거 타이쿤'이라는 보드게임이 갖고 싶다고 했다.
"보드게임 언제 사줄 거야?"
"글쎄 보드게임 살 타이밍이 아닌 거 같은데."
"그럼 어린이날? 발렌타인데이? 빼빼로데이? 크리스마스나 생일 되면 사줄 거야?"
"한 달 동안 하루에 책 3권씩 읽는 미션을 지키면 사줄게. 대신 엄마가 책 읽으라고 시키지 않을래. 잔소리는 너도 싫잖아. 스스로 책 3권 읽기! 어때 할 수 있겠어?"
"좋아!"
오호, 나쁘지 않은 반응을 빌미로 당장 미션 스티커 달력을 칠판에 붙여두었다. 오늘 저녁은 스스로 책을 꺼내 읽고 기분 좋게 잠들었다. 빨리 갖고 놀고 싶을 텐데 엄마의 제안을 기꺼이 수용해 주는 아이가 고마웠다.
부자가 될 주제도 못되지만 아무리 부자라고 한들 아이가 원하는 것을 모두 다 채워줄 수 있을까. 나는 부자가 되기보다 쉬운 길을 택했다. 조금 적게, 조금 늦게 가져도 만족하고 행복할 줄 아는 것.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믿는다. 나 역시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아이가 잠든 밤 그토록 갖고 싶어 하던 '햄버거 타이쿤'을 미리 주문한다. 성실하게 미션을 마치고, 이달의 마지막 날 기분 좋게 선물을 받아 들 아이 모습을 상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