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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담하게 Apr 01. 2024

벌거벗은 몸도 부끄럽지 않은

사랑의 모습

'사랑'이란 도대체 뭘까. 궁금했던 시절이 있다. 그런 게 과연 있기나 할까. 믿어지지 않았던 시간이 길었다. 사랑이라는 게 있다면 주기보다는 받고 싶었다. 누군가 7월의 햇볕처럼 쏟아져주기를 파도처럼 덮쳐주기를 바랐다. 언제쯤 사랑이 뭔지 알게 되었느냐고 묻는다면 비겁하게도 가장 약하고 못난 모습이었을 때 느꼈노라고 답할 수밖에.


돌이켜보니 풋풋했던 연애감정도 분명 사랑이었지만 지금에 비하면 그 농도는 아주 옅었다. 꽃망울이 팝콘처럼 터지듯 참을 수 없이 돋아나던 쉽고도 예쁜 말, 그땐 사랑이 그랬다. 사랑이라는 게 그렇게 쉽고 예쁘기만 했다면 좋았을 텐데, 짧게나마 살아보니 그것만으로 완성되는 건 아니라는 걸 이제는 안다. 


나는 꼿꼿한 사람이었다. 자라던 시절 어린이 프로그램 제목이기도 했던 '혼자서도 잘해요'는 내 인생의 좌우명이자 틀이었다. 남한테 의지하기보다는 혼자 해 내고, 도움을 받느니 조금 더 주는 편이 편했다. 무언가를 받으면 돌려줘야 할 생각에 벌써 피곤해지는 종류의 인간이었다.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거나, 힘들다고 감정을 호소하는 사람, 심지어 몸이 자주 아픈 사람도 내겐 그저 유약하고 의지가 부족하 사람으로밖엔 보이지 않았다. 


영업직에 종사했던 엄마는 영업을 염두에 두고 주변에 호의를 자주 베풀곤 했는데, 집에선 늘 사람들이 염치가 없다고 오갈 곳 없는 신경질을 내게 쏟아냈다. 그때마다 선심 쓰듯 선물이나 마음을 주고 불확실한 대가를 바라는, 그러다 분에 못이겨 자리에 누워 앓아버리고마는 엄마가 한심스러워 보였지만, 그때부터 나는 누군가에게 받은 만큼 돌려주어야 욕을 먹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뿌리 깊게 박혔다. 그리고 그건 꽤나 단정한 태도라고 생각했다. 


돈이나 물건이라면 값으로 매겨 칼같이 갚을 수 있을 텐데, 삶에는 그런 등가교환의 법칙만 존재하는 건 아니었다. 누구나 불시에 신체적으로 불행이 닥칠 수 있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내가 하루아침에 중환자가 되어 침상에서 꼼짝할 수 없는 신세가 되어버릴 줄은.. 당시의 나는 그저 도움을 받기만 하는 존재로 하루하루를 견뎌야 했다. 몸을 일으키는 것은 물론, 머리 감는 것, 먹는 것, 소변량 기록을 위해 화장실 가는 일까지 모두 남편의 도움으로 움직여야만 했다. 세상에서 가장 작고 형편없는 사람이 된 것이다. 배에는 일명 수류탄이라 불리는 피주머니를 매달고, 매일 소독을 위해 한 뼘만큼의 메스자국이 선명한 배를 보였다. 그때의 나는 여자가 아니라 노파나 마찬가지였다. 정신과 육체가 무너져버렸던 병상에서의 나는 수치심도 잊은 채 지냈다. 이런 날도 있는 거구나. 이렇게 무방비인 상태로 지낼 수도 있는 거구나. 신기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일생을 지배해 온 감정 하나가 '수치심'이었건만, 남편 앞에서는 그것마저도 내려놓을 수 있었다. (7살 무렵 피아노학원에 가다가 대변 실수를 하고도 집 앞에 주차된 아버지의 차를 보고 차마 집에 들어가지 못한 채 학원 연습실로 숨어들었던 어린이가 나였다.) 병든 모습일지언정 그 앞에서 마음껏 망가지고 무너졌다. 그런 내가 이상하면서도 동시에 편안했다. 이런 모습을 누구에게도 보이기 싫었지만 그에게만은 괜찮았다. 부부라는 게 이런 것일까. 그때 처음 느낀 것 같다. 아이를 출산할 때보다도 더 강렬하고 묵직한 울림이었다. 


벌거벗은 몸도 부끄럽지 않은 존재가 세상에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위로였는지...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진정으로 깨달았다. 그리고 한편 내가 얼마나 이기적인 인간인지도 알게 됐다. 중학교 때 엄마의 병간호를 하기도 했지만, 내 인생에 다시 누군가를 간호할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다시는 나 아닌 누군가를 보살피고 싶지 않다고.. 하지만 지금은 안다. 진심을 다해 보살필 누군가가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사랑인지. 그러니 부부란 서로에게 얼마나 감동을 주는 존재인지. 남편이 내게 보인 진한 사랑의 농도를 확인한 후에야 마음을 고쳐먹은 비겁한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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