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작년쯤 시댁에서의 일이다. 시부모님은 우리가 갈때마다 저녁식사에 반주를 곁들이며 대화 시간을 갖곤 하는데 이 시간은 내가 시댁에서 가장 좋아하는 순간이다. 달변가인 어머님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면 기분 좋게 한바탕 웃다가 식사가 끝나곤 한다.
그날도 여느 때와 같은 날이었다. 어머님은 '도리'에 대한 이야기를 주제로 꺼내셨다. 듣다 보니 본인의 아들, 나의 남편인 그가 도리를 다 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요지였다. 더 자세한 내용으로는 내가 엄마와 연락하며 지내진 않지만(이 내용을 따로 언급하진 않으셨다. 뉘앙스로 느꼈을 뿐) 어쨌든 아들은 사위로서 도리를 다 하라는 것. 어버이날이나 생신 때는 연락드리고 용돈도 보내드리라는 것이었다. 내내 웃고 있다가 급변한 대화주제에 나는 어떤 표정을 지으며 앉아있어야 할지 모르겠어 얼굴이 붉어졌다.
나를 향한 말은 아니었으나 분명 흘려들을 순 없는 말이었다. 내가 엄마와 절연했다는 사실을 남편을 통해 고백했을 때 어머니는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저 묵직한 반찬 보따리만 싸서 보내주셨다. 그걸로 안심했는데 어머니는 그로부터 몇 년의 시간이 지났으니 이만하면 되었다 생각하신 걸까.
"며느리는 엄마랑 가족이니까 언젠가 다시 잘 지내게 될 수도 있어. 근데 사위는 그러면 안돼. 네가 할 도리를 다 해놓지 않으면 나중에 외면받을 수도 있다는 뜻이야. 나는 너가 누군가에게 도리를 다하지 않는 사람으로 남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그 말을 끝으로 저녁자리는 마무리되었다.
그 순간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뛰고, 얼굴이 달아올라 델 것처럼 뜨거워졌다. 짧은 순간동안 수많은 생각이 스쳤다. 버림받은 것 같았다. 결국 이해하지 못하신 걸까. 그런 거였구나. 언젠가는 다시 화해할 수 있는 정도의 갈등이라고 짐작하셨던 거구나. 언젠가는 다시 엄마와의 사이를 회복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계셨던 거구나. 나를 독한 아이라고 생각하시는구나. 그렇구나. 그랬구나...
생각들이 휘몰아쳐서 그 자리에서 기절해 버릴 것처럼 정신이 아득해져 버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약간의 공황 증상 아니었을까 싶다. 내게 당장 엄마랑 화해를 하라고 한 것도 아닌데 마치 그런 이야기라도 들은 양 혼란스러웠다.
무슨 용기였는지 식탁을 다 치우고 설거지하시는 어머님 뒤로 다가갔다.
"어머니, 제가 엄마랑 화해해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그렇게 물어놓고는 앞이 보이지 않았다. 이미 눈물이 가득 차 올랐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저 다 이해하는 줄 알았어요. 근데 아니었어요? 내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얼마나 아팠는지 묻지도 않으시고 덮어주셨잖아요. 근데 왜 이제 와서 그런 말씀을 하세요?'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얼굴 근육이 말을 듣지 않았다. 엉망으로 일그러지며 엉엉 울었다.
어머니는 놀란 표정과 함께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 물으셨다.
"당연하지. 너 엄마 안 보고 싶어?"
어린아이처럼 울음을 헐떡이며 난 말했다.
"안 보고 싶어요. 저는 엄마가 됐는데도 엄마를 이해할 수 없어요. 지금이 좋아요. 지금이 좋은데 저 돌아가야 해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저는...!"
터져 나오는 울음을 가눌 길이 없어서 외치듯 말해버렸다. 그리고 다시 또 밀려왔다. 혼자 있을 때마다 머릿속에서 날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늘 해왔던 변명 아닌 항변들. 당장이라도 세상에서 사라져 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껄껄 웃으며 대개는 행복한 사람처럼 지내다가도 바람 빵빵하게 든 풍선처럼 작은 충격에도 감정은 울컥 터져버렸다. 다 털어놓고 싶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딱 잘라 말씀하셨다.
"너한테 말한 거 아니야. 아들한테 말한 거야. 너 말고 쟤는 쟤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너 없을 때 얘기 했어야 하는데 내가 잘못했다."
"저 들으라고 얘기한 거잖아요. 제가 딸 역할 도리 안 한다고 생각하시는 거죠. 저 이상하다고 생각하죠."
"아니야. 넌 너야. 내 딸 아니고 며느리잖아. 상관 안 해. 너한테 이래라저래라 안 한다고. 아들한테 말한 건데 내가 생각이 짧았어. 미안해." 어떤 판단도 느껴지지 않는 단호한 말투였다.
남편은 어머니에게 본인이 알아서 할 테니 더 이상 그런 얘기를 꺼내지 말라고 어머니에게 당부했다.
뭐랄까. 와르르.. 무너진 느낌.
'넌 너야. 내 딸 아니고 며느리잖아. 상관 안 해.'
이 집이 좋았던 나는 며느리가 아니라 딸이 되고 싶었나. 와중에 그 맞는 말이 왜 그렇게 서운했던 건지. '며느리는 딸이 아니다'라고 외치는 세상이건만 나는 이 집에 입양된 자식처럼 편입되길 바랐나 보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아침 차리는 소리로 분주한 거실로 어떻게 나가야 하나 고민하다가 마치 아무 일 없었던 듯 명랑하게 인사했다. 다행히 어머님도 평소처럼 대해주셨다. 식사 후 나란히 앉아서 TV를 보는데 어머님이 먼저 입을 떼셨다.
"정말 너 들으라고 한 소리 아니야. 너 없을 때 귀띔할걸 후회했어. 잘못했어."
그냥 끄덕이고 또 주르륵하는 것 말고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가만히 있었다.
아버님은 "왜 또 애를 울려~" 하시고, 나는 멋쩍게 웃어 보였다.
그걸로 끝. 우리는 이제 더 이상 그 주제로 대화를 하지 않는다.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역할에 충실하며 시시콜콜한 사는 얘기로 웃고 떠들다 헤어진다.
난 여전히 어머니가 좋다. 어머니도 날 좋아하신다. 하지만 어머님이 내가 친정엄마와 화해하길 원한다고 해도 그 바람은 듣진 않을 것이다.
나중에 감정이 가라앉은 뒤 한 발 물러나 생각해 보니 '넌 너야. 내 딸 아니고 며느리잖아.'라는 말이 참 안심되기도 했더랬다. 어머니는 우리 사이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계셨다. 우린 가깝지만 상대가 원하지 않는 무언가를 요구할 수 있는 사이는 아니다. 만일 내게 어떤 걸 기대한다고 고백하셨다면 나는 또 다른 굴레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머니는 여전히 웃기고, 지혜롭다. 그런 그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사랑한다.
나의 엄마는 아닌 나의 시어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