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이 태도가 되는 날이 있다. 인정하기 싫지만 부인하기 힘든 나의 부끄러운 모습이다. 잘 지내다가도 짜증 섞인 아이의 태도나 말투에 내 기분은 쉽게 찌그러진다. 이제 어린이가 하는 말이라곤 믿을 수 없을 만큼 완벽하게 문장을 구사하기 시작한 딸은 말투로보나 내용으로 보나 어른인 나와 견줘도 손색없는 말솜씨를 자랑한다. 어느새 훌쩍 커 좋은 대화상대가 되어주기도 하지만 태도에 따라 내게 도전하는 맹랑한 꼬맹이로 보일 때도 많다.
나의 분노버튼은 버럭 했을 때 돌아오는 아이의 반격에 의해 눌러질 때가 많은데 대부분 맞는 말이라서 딱히 반박할 내용이 생각나지 않을 때 이성의 끈이 느슨해지면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아이와 하루종일 같이 있는 날이면 '놀아줘'라는 말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듣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나의 짜증게이지는 계속 차오른다. 집안에서는 계속할 일이 있고, 다 해치우면 잠시나마 앉아서 쉬고 싶은데 아이는 끊임없이 자신을 즐겁게 하라고 명령하듯 말하기 때문이다.
"놀아달라고 좀 그만해. 혼자 놀 줄도 알아야지! 엄마는 지금 할 일이 많아. 너 놀아주는 사람 아니라고!"라고 말하면 아이는 도끼눈을 뜨고 답한다.
"그럼 내가 누구한테 놀자고 해? 이 집에 엄마밖에 없는데!"
"그래도 엄마가 다른 일 하고 있으면 기다릴 줄도 알아야지!"
"이미 지금까지 계속 기다렸단 말이야!"
"근데 너 왜 엄마한테 자꾸 싸가지 없이 말하냐!"
"아까는 예쁘게 말했거든? 그래도 엄마가 계속 계속 계속 계속 안 놀아주니까 내가 이렇게 변하지!"
다 맞는 말이라 허를 찔리고 나서 내가 먼저 웃음이 푸식 터지면 한껏 흘겨보던 아이도 같이 깔깔거리다 티격태격은 끝을 맺는다.
감정이 예민한 나는 아이의 말투에서 '싸가지'농도가 높아지면 급격히 흥분하곤 하는데, 이건 나의 엄마도 그랬다. 내가 퉁명스럽게 말하면 '너 나 무시하냐?'라면서 항상 발작 수준의 화를 내곤 했다. 사소한 태도에도 무언가 의도가 있다고 여기면서 캐묻기 시작하면 '서방 복 없는 년은 자식 복도 없다더니'라는 지긋지긋한 관용구로 끝이 났다. 그러나 이러한 부분도 어쩔 수 없이 닮는 건지.. 나 역시 아이 말의 뉘앙스나 태도에 기민하게 반응한다. 약이 바짝 올라서 마치 초등학교시절 동갑내기와 싸우듯이 7살짜리와 대거리를 할 때도 실은 많다.
다만 내가 엄마와 다른 점은 나와 아이의 감정을 절벽 끝까지 밀어붙이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태도에 매몰되어 아이의 의도에 살을 붙여 곡해하지 않는다.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아이가 말대답하는 걸 보면 화가 치솟으면서도 한편 너무 신기하다. 저 작은 생명체 생각이 너무나 논리 정연하고 날카로워서 감탄스럽기까지 하다. 그래서 버럭 하다가도 금세 풀리는 것이다. 아이의 싸가지(?) 태도를 그저 나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하기보다 객관적으로 시선을 멀리에서 두면 대체로 아이가 사랑스러워 보이는 쪽으로 결말을 맺는다.
살다 보면 우리는 많은 상황에서 공손함을 요구받는다. 나 역시 그랬다. 엄마는 늘 '공손', '순종' 따위의 단어로 나의 정당한 발언과 태도를 비난했다. 시간이 흘러 내 아이의 그런 태도를 볼 때 내 시야는 두 가지로 갈라진다. 딸인 나와 엄마인 나로 말이다. 그러면 답을 도출하기는 쉽다. 어른인 쪽이 더 품어주자는 것이다. 아이가 정말로 잘못한 것이 아니라면 그 논리에 못 이기는 척 넘어가주는 거다. 설령 그 태도가 조금 싸가지 없어 보인다고 해도 말이다. 인생에 있어 한번쯤 버르장머리 없는 철부지로 살아볼 권리는 누구에게나 있는 것 아닐까. 범 무서운 줄 모르는 나의 사랑스러운 하룻강아지.
불행했던 유년을 거울삼아 하룻강아지의 해맑음을 지키는 중이다. 그렇게 내 그늘에도 온기가 스며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