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꿈 속에서 엄마를 본다.
꿈의 디테일은 흐릿하지만 상황은 언제나 비슷하게 기억된다.
언제나 꿈 속의 나는 위기에 처해있다. 그런 내 앞에 엄마가 있다.
여전히 가장 냉정한 얼굴로.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소리 지르면 들릴 거리에 있으면서도
우두커니 서있거나 혹은 여전히 나를 비난한다.
그 상황이 너무나도 지옥같아서 소리도 나지 않는 비명을 지르며 분노하다 잠에서 깨면
매번 나는 꺼이꺼이 울고 있다. 그리고 곧 안도한다.
꿈 속의 엄마가 약해보이지 않아서.
만일 꿈 속의 엄마가 약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날에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엄마와 연락을 하지 않고 지낸지 햇수로 4년이 넘었다.
첫 해에는 꿈을 꾸지 않더라도 매일이 몽롱한 상태로 혼자 남겨진 일과의 대부분을 울며 보냈다.
설거지를 하다가도 울고, 운전을 하다가도 울고, 밥을 먹다가도 울었다.
4년 전인 2019년, 불시에 찾아온 내 육체의 불행은 인정머리 없게도 정신적인 불행도 함께 던져줬다.
형언할 수 없는 고통 앞에서 너무도 태연했던 엄마의 모습
아픈 딸에게 마저 딸의 도리와 상냥함을 기대하던..
그리고 괘씸해하던
내 배에 세로로 한 뼘 만큼 남은 메스자국은
어쩌면 엄마를 도려낸 흉터이기도 했다.
그날 이후 엄마와의 완전한 분리를 택하게 됐던 건 내게 불행이었을까. 행운이었을까.
시간이 흐른 만큼 수술 흉터는 맨들맨들해졌다.
이제 더는 맨정신에 엄마를 떠올리며 울지 않는다.
여전히 이해할 수 없지만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가끔 꿈 속에서 엄마를 본다.
시간이 더 흐르면 꿈 속에서 엄마를 만나도 울지 않을 수 있을까.
꿈에서도 분노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내 얼굴에 잔주름이 늘어나는 만큼
엄마는 오늘도 어제보다 더 늙어가고 있겠지.
부디 바랄뿐이다.
꿈이 아닌 곳에서 엄마를 만나지 않기를
어딘가에 있을 엄마가 약해지지 않기를
내가 기억하는 모습 그대로 이기를
늙음을 무기로 내 앞에 나타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