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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윤담 Mar 07. 2024

오, 나의 가여운 나르시시스트 엄마

샤워할 때마다 벌거벗은 채 거울 앞에 서면 시선은 늘 배로 먼저 향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배꼽 위로 25cm쯤 길게 나 있는 흉터를 본다. 개복수술로 인해 생겨난 것이다. 꿰맨 자국은 맨들맨들해졌지만 원래 살보다 색이 밝고, 약간 볼록하게 솟아있어 눈에 띈다. 평생 지워지지 않을 문신과도 같은 상처는 볼 때마다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이 상처가 생기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친정엄마로부터 멀어질 결심이 섰기 때문이다. 


담관의 10cm짜리 혹을 떼어내기 위한 수술을 마치고, 항생제 내성균에 감염돼 중환자실로 옮겨졌던 그날, 내 소식을 전하던 남편에게 엄마는 내게 서운했던 일화들을 1시간 넘게 나열하며 끝내 '연락을 하기 싫으면 하지 말라'는 칼 같은 말을 남겼다. 중환자실로 옮겨지기 며칠 전 하루에 한 번씩 자신에게 전화해 나의 안부를 전하라던 엄마의 명령을 거부한 것이 화근이었다. 아픈 사람이 안부가 궁금할 사람을 위해 직접 전화를 해야 한다니.. 납득할 수 없었기에 차갑게 전화를 끊었던 내가 괘씸했던 거다. 


그로부터 벌써 5년이 흘렀다. 나는 더 이상 엄마에게 안부를 전하지 않는다. 그건 엄마도 마찬가지이다. 내 안에서 엄마를 끊어내기 위해 수없이 많은 고통을 겪으며 헤쳐 나온 지금의 나는 멀어진 정서적, 물리적 거리만큼 안정을 찾아가고 있는 듯하다. 그러니까 내 배에 선명한 베임의 자국은 엄마와의 절연을 상징하는 실제적 형상이라고도 설명할 수 있겠다. 




한때는 엄마를 생각하면 조절할 수 없는 신체의 통증과 구토 증상이 올라와 견딜 수 없이 힘들었다. 5년이라는 시간 동안 엄마를 증오할 만큼 했고, 더 아플 수 없을 만큼 아팠다고 믿는다. '엄마'라는 단어로부터 끓어오르는 감정의 에너지도 많이 소진되었다고 느낀다. 그래서일까. 요즘 도로 엄마를 종종 떠올린다.


연민이나 후회, 가여움 같은 종류의 감정은 결코 아니다. 

엄마가 아니라 세 글자 이름을 가진 한 여자를 떠올리는 것에 가깝다. 소설 속 인물이나, 초등학교 1학년때 담임 선생님의 얼굴을 톺아보듯 하는 것이다. 


그 사람은 아주 멀리에 있고, 흐릿하지만 강렬하게 느껴진다. 그는 여자이고, 수려한 외모를 가졌다. 풍성한 머리숱, 동산처럼 볼록하게 솟은 이마 아래론 콧날이 유려하게 흐른다. 긴 속눈썹, 갸름한 얼굴, 깊은 눈매, 웃을 때 시원하게 트이는 입술, 여리한 어깨와 오목한 쇄골, 아담한 키는 뭇 남성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버스를 타고 내리면 으레 남자 몇 명 정도는 따라올 정도로 인기가 많았지만, 그는 너무나 도도했기에 스물일곱 살이 되던 해엔 주변에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80년대에 미혼인 27세 여성은 노처녀로 분류됐다. 여자가 '이대로는 안 되겠다, 결혼을 해야겠다'라고 결심했을 때 앞에 있던 남자는 웃음이 헤프고, 키는 멀대 같은 대학생이었다. 어딘지 비어보이는 구석이 있어 탐탁지 않았지만 이제 와서 다른 사람을 알아보기엔 자신의 나이가 너무 많다고 생각했다. 결국 여자는 헤픈 미소를 믿어보기로 하고 웨딩마치를 울렸다. 


시어머니는 여자가 없는 집 자식이라고 무시했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밥부터 차리라고 시켰다. 웃음이 헤펐던 그의 남편은 미소뿐만 아니라 허세도 헤펐다. 변변한 직장도 잡지 않은 채 사업을 하겠다며 쥐뿔도 없는 주제에 떵떵거리고 다녔다. 남편이 시댁에 손을 벌려 사업을 시작하려고 하자, 시댁에 가서 무릎을 꿇고 돈을 빌려주지 말아 달라고 빌었다. 그러자 시어머니는 건방지다며 여자를 밀치곤 귀를 물어뜯었다. 그 당시 뱃속엔 딸이 들어있었다. 


아이를 낳으면 정신을 차릴까 싶었지만 남편은 인맥을 쌓는다며 지역 로터리 모임에 날마다 나가고, 가세는 계속해서 기울었다. 돈이 필요하면 여자의 남편은 아이를 할머니댁에 맡겼다. 일종의 담보 같은 것이었으리라. 남편은 할머니가 손주를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할머니는 애가 자신을 따르지 않는다며 못마땅해했다. 오래된 주택의 반질반질한 나무 마룻바닥은 밟을 때마다 삐걱삐걱 소리가 났다. 아이는 밤이면 불 꺼진 거실에 퍼런 빛을 내는 어항이 무서워 내내 울다 잠이 들었다.  


여자는 허세에 절어있는 남편과 지독한 시집살이 속에서 살아갔다. 사업을 한다던 남편은 어느 날 트로트 가수가 되겠다고 선언한다. 녹음을 핑계로, 미팅을 핑계로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심부름센터에 남편의 미행을 의뢰했다. 경기도 어느 허름한 빌라에 두 사람이 들어가 있는 것을 알게 된 여자는 벽돌로 남편의 차를 부순다. 소리치며 벽돌을 집어던진다. 유리 파편이 튄다. 새벽녘 사람들이 소리에 놀라 창문을 하나 둘 연다. 

남편과 함께 등장한 내연녀는 너무 못난 모습이었다. 뽀글이 파마머리의 퉁퉁한 아줌마의 모습을 보고 여자는 기가 막혔다. 여자가 뭐 때문에 홀렸느냐고 묻자, 남편은 엄마 같아서 좋았다고 답했다. 


여자의 화는 활활 타올랐다. 여자의 딸은 의젓하고 꽤나 어른스러워 퍽 믿음직했다. 여자의 마음을 다 이해해 줄 수 있는 존재였다. 여자는 가감 없이 속 얘기를 털어놨다. 남편에 대한 증오와 불륜의 과정, 갈기갈기 찢어진 자신의 심경까지. 딸은 가만히 앉아 들었고, 남편을 증오하는데 기꺼이 동참했다. 

딸이 있어 다행이라고 여겼다. 딸은 그의 충실한 전사였다. 자신만큼이나 남편을 미워했고, 여자를 대신해 남편과 싸워주었다. 눈에 불을 켜고 제 아비와 싸우는 모습은 여자에게 크나큰 위로였다. 


어린 아들이 이혼을 반대했기에 여자는 별거를 택했다. 가장이 된 여자는 화장품 방문판매를 시작했다. 처음 시작한 일이었지만 수완이 좋아 돈도 많이 벌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암에 걸렸다. 보호자가 없었기에 중학생이던 딸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딸은 여자의 치부와 고통을 다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딸은 강인하게 자랐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용돈과 학비도 버는 딸이 기특하다. 여자는 자신이 강인하게 키운 덕이라고 생각한다. 


여자는 홀어머니 밑에서 4남매 중 둘째로 자랐다. '아비 없는 자식' 소리 들을까 봐 그녀의 엄마는 자식들을 엄하게 키웠다. 정확히 말하자면 딸들만 엄하게 키웠다. 여자는 참기름이 엄청나게 비싼 식재료인 줄 알고 자랐다고 했다. 비빔밥에 넣어먹을 고소한 참기름을 사달라고 얘기하자 등짝을 후려 맞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학창 시절엔 점심도시락이 없어 수돗물로 배를 채우고, 학교 운동장 구석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반면 남동생들이 깜빡하고 도시락통을 챙기지 않으면 여자의 엄마는 버선발로 뛰쳐나가 기어이 손에 도시락을 들려주었다고 했다. 준비물 살 돈을 달랬다가 하숙생들이 보는 앞에서 따귀를 맞았다고도 했다. 여자의 엄마는 감방을 들락거리는 막내아들을 끔찍이도 사랑했다고 했다. 여자의 엄마는 아들을 사랑한다고 했지만 그 아들은 엄마가 하늘로 갈 때까지 그 사랑이라는 이름의 올가미에 버거워했다. 분노했다. 


여자는 자신의 엄마와는 다르게 딸을 잘 키워냈다고 믿는다. 심지어 온전한 사랑으로 길러냈다고 믿어의심치 않는다. 남들에겐 이렇게 기특한 아이는 드물다고 입이 마르도록 칭찬한다. 딸은 여자의 대외적인 자랑의 도구이다. 집에선 딸에게 늘 외모를 지적하고, 딸보다 나은 딸들의 이야기를 숱하게 들려주며 효도를 은근히 요구한다. 사회생활에서 받았던 모든 울분과 부조리를 딸에게 쏟아낸다. 여자는 딸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줘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딸을 보면 이 아이를 키우기 위해 고생했던 지난한 날들을 위로받고 싶어 진다. 이 아이를 세상으로 끄집어내느라 느꼈던 산고가 아직도 생생하다. 반면 3살 터울로 어린 아들은 아직도 아기 같기만 하다. 세상의 어떤 부정적인 이야기도 그 아이에게는 다 숨겨주고 싶다. 하지만 여자에게는 인생의 풍파를 전가할 대나무숲이 필요하다. 딸을 붙잡고 부유하는 생각들을 뱉어낸다. 이만큼 아팠노라, 비참했노라, 죽지 못해 살았노라고. 모든 것은 너때문이었다고.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딸은 클수록 퉁명스러워진다. 여자의 눈을 쳐다보지 않는다. 여자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는다. 더 이상 그런 얘기는 듣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딸은 자신이 상처받았다고 말한다. 엄마로 인해 괴롭다고 절규한다. 여자는 결코 인정할 수 없다. 딸이 못 견디게 괘씸하다. 지난 모든 세월을 아 아이에게 보상받고 싶다. 이자까지 쳐서 받아내고 싶다. 

딸은 계속 뒷걸음질 친다. 딸의 뒤편으로 절벽이 보인다. 딸은 끝없이 여자를 나쁜 사람으로 몰아간다. 화가 난다. 여자는 앞으로 앞으로 걷고 딸은 뒤로 주춤주춤 걷는다. 

두 사람 모두 걸음을 멈출 수 없다. 두 사람 모두 서러워 견딜 수 없다. 

모든 게 저 년 때문이다. 내 마음도 모르는 저 년 때문이다. 

툭, 

정신을 차려보니 앞에 아무도 없다. 절벽 아래엔 까마득한 어둠뿐이다. 


엄마는 그런 사람이었다. 나는 여기에 서서 그 여자를 바라본다. 제 분에 못 이겨 딸을 절벽 끝으로 밀어버린 여자다. 


5년 전, 정신과에 상담을 다닐 때 의사는 내게 30년 뒤 엄마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고 했다. 

어느 요양병원, 바싹 말라서 볼이 패인, 쩍쩍 갈라진 주름, 다 빠져서 두피가 드러난 백발, 힘없는 표정, 감정 없는 눈빛, 주렁주렁 달려있는 링거, 소독약 냄새, 철저하게 혼자 남은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상상이라도 동정은 들지 않았다. 바라봤다. 떠올릴수록 차분하고, 담담해졌다. 

의사에게 전했다.

"충분히 그럴만한 모습이었어요. 한편 가엽기도 했지만 그건 일말의 양심이 조종하는 착각일 뿐이죠. 나를 이렇게 망가뜨린 사람이라면 그렇게 늙어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나중에 그 모습을 현실로 보게 된다 해도 저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을 것 같아요. 그게 제가 엄마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형벌이겠죠."


그때는 그랬다. 정말 상상만으로도 통쾌함을 느꼈으니까. 

그러나 5년이 지난 지금, 감정은 남아있지 않다. 

엄마의 불행도 행복도 바라지 않는다. 

그냥 한 번씩 머릿속에 동그랗게 떠오르는 엄마를 그저 바라볼 뿐이다. 

그가 그일 수 있도록 그곳에 둔다. 


어느 날, 잠든 아이 옆에 누워있다가 꿈도 현실도 아닌 환영 속 풍경을 봤다. 

보랏빛 하늘, 바다 한가운데 볼록한 등을 반쯤 내민 채 유영하고 있는 고래의 형상이었다.

고래는 나라는 걸 바로 알아챘다. 바다 위 떠있는 작은 섬엔 한 여인이 손을 뒤로 묶은 채 눈을 가리고 허공을 향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지만 

고래는 오래도록 작은 섬을 바라봤다. 

그러다 반대편으로 유유히 헤엄쳐가기 시작했다. 

'멀리 가, 깊은 곳으로 가, 다시는 돌아오지 마.' 풍경을 보며 빌었다. 

고래는 떠났다. 

너무나도 선명히 아름다운 보랏빛 풍경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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