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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든다면 윤여정 배우처럼

<여행의 이유>, 김영하 작가의 그 문장


때로 우리는 노바디가 되어
현지인 사이에 숨으려 하고,
섬바디로 확연히 구별되고자 한다.
- 김영하 <여행의 이유>'노바디의 여행'-

김영하 작가는 <여행의 이유>에서 말한다. 여행에서 노바디로 살아보고, 때로 섬바디로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체험해보라고.




김영하 작가의 문장이 떠오른 건 영화 '미나리'를 보고서다. 미나리는 1980년대 미국으로 이민한 한국 이민자 가족이 시골에서 농장을 만드는 이야기의 영화다. 스펙터클한 전개 없이 잔잔히 흘러가지만 잔잔함 속에 인물들의 출렁이는 섬세한 감정이 깃들어 있다. 안전지대 없이 살아가는 이민자 가족들이 작은 흔들림에 어떻게 갈등하고 이해하고 풀어가는지, 그 속에서 가족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다 이모네 가족의 이민이 떠올랐다.



이모부는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다 뒤늦게 목회자의 길을 걸었다. 사촌들이 대학생이 될 무렵 직접 세운 한국 교회를 떠나, 갑자기 미국 시애틀로 이민을 가 목회 활동을 하시다 그곳에서 정년을 맞았다. 정년 후엔 후원하던 필리핀으로 이주해 선교활동을 하며 지내셨으니 두 번의 걸친 이민자의 삶이었다.



그러다 코로나로 필리핀 국경이 폐쇄되기 직전, 한국으로 영구 귀국하면서 부부는 70이 넘어서야 이민자에서 평범한 일반인의 삶으로 돌아왔다.





이모네 가족의 이민 생활을 본 적은 없지만, 낯선 타지의 경험은 나의 어린 시절 전학 다니던 때와 겹쳐진다. 어린 시절 잦은 이사로 전학을 많이 다닌 나는 전학 가던 첫날이 아직도 선명하다.



전학생 져니. 독립적이란 말을 칭찬처럼 받아먹으며 잘 적응하는 듯 보였지만, 새 친구를 사귀고 새로운 동네를 알아가는 일은 반복해도 참 익숙해지지 않는 일이었다.



주머니 속에 넣어 둔 밤송이처럼 까슬까슬하다 가끔씩 가시에 찔리는 느낌. 그냥 넘어가던 일이 여기서는 걸림돌이 되고, 나를 증명해야 할 귀찮은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불안함. 나를 환대하는 친구가, 저들 사이에서 어떤 결의 친구인지 알 수 없는 불투명함.



이모의 이민이든, 어린 시절 나의 전학이든 우리 같은 '노바디’가 새로운 터전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는 ‘섬바디’ 임을 증명해야 한다는 거. 거기에 묘한 공통점이 있다. 김영하 작가의 문장처럼.




이 생각을 불러온 영화 미나리는 그 후 아카데미에서 승승장구하며 우리나라 최초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하고 각종 분야에서 후보에 올랐다. 수상한 윤여정 배우의 연기도 훌륭했지만 그보다 품위 있는 유머와 내공이 뚝뚝 묻어나는 인터뷰가 사실 더 맘에 들었다. 그중 '75세의 고령의 나이에 힘들게 미국까지 가서 영화를 찍은 이유'를 묻는 질문에 대한 답이 매우 인상적이다.


여기서는 내 맘대로 다 할 수 있다.
감독들은 내 나이 때문에, 내 오랜 경력 때문에 더 요구하지 못하고, 나는 거기에 길들여지면 그게 ‘괴물’이 되는 거다.


그런데 나를 모르는 미국에서는
아무도 나에게 그런 대접을 하지 않는다.
거기서 나는 ‘노바디’다.'
그렇게 노바디의 정신으로 만든 영화가 미나리다.

그녀가 선택한 도전은, 자발적인 노바디의 정신! 건조한 말투였지만 꼰대 같지 않고 참 괜찮은 어른의 모습을 본 것 같아서 '닮고 싶은 노년'의 모습이 그려졌다. 저렇게 나이 든다면 썩 괜찮겠는데! 저토록 쿨내 진동하다니... 그 바탕엔 '노바디'의 정신이 있을지 모르겠다. 없을 때야 비로소 '있음'을 깨닫게 되는 아이러니! 그리고 노바디의 환경에서 다시 존재감 있는 섬바디로 살아내는 용기!



말처럼 쉽지 않겠지만, 때때로 자발적인 ‘노바디’의 정신으로 살아간다면, 꼰대소리 듣지 않고 윤여정 배우처럼 멋지게 늙어갈 수 있지 않을까? 나이 든다면, 윤여정 배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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