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늦바람 난 빠순이의 고백

<자기 앞의 생>, 에밀 아자르의 그 문장

"완전히 희거나 검은 것은 없단다.
흰색은 흔히 그 안에 검은색을 숨기고 있고,
검은색은 흰색을 포함하고 있는 거지. 오래 산 경험에서 나온 말이란다 “
- 에밀 아자르, ≪자기 앞의 생≫


# 빠순이는 아무나 되나?

난 빠순이가 되기 힘든 타입이다. 감정에 풍~덩 빠지기보다 관찰하기 일쑤이고 특히, 오디션 프로그램에 대한 거부감이 있다. 인생도 힘든데, 굳이 경쟁하며 누군가를 밟고 올라서야 하는 오디션 프로그램의 태생이 잔인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난해 오디션 프로그램인 <싱어게인>은 좀 달랐다. 벌써 시즌2를 맞이한 싱어게인은 ‘공기 반, 소리 반’ 같은 이해 못 할 말로 참가자를 몰아세우는 잔인한 심사평도 없고, ‘너 죽고 나 살자’ 식의 경쟁보다 다양한 색감의 노래를 한자리에서 들을 수 있는 ‘공연’ 느낌이었다.




# 타인을 향해 신발을 돌려놓는 30호 가수

가장 마음이 가는 사람은 누구 하나 패배시키지 않고 이기는 분위기를 만들어낸 30호. 팀 대결에서 상대 팀을 이기고도 눈물을 흘리는 이상한 오디션 장면을 연출하지 않나. 보통스럽지 않는 태도와 말맛이 느껴지는 그의 인터뷰가 인상적이라 그의 말들을 수집해 보았다.



"그는 잘했다. 나도 잘하겠다. 둘 중 하나가 패배자가 아닌 무대를 보는 심사위원들을 패배자로 만들겠다."

“언제나 노래가 이름보다 앞에 있는 가수가 꿈이었다”

“나는 뭔가 부수려고 하는 게 아니라 더하려고 한다. 나는 이런 음악도 하는데 들어볼래?”

“이 무대 밖에 수많은 72호 가수들이 있다는 것을 알아달라. 내가 먼저 주단을 깔아놓고 기다리겠다."

“마스크 시대라 눈밖에 안 보지만 나를 빛내기 위해 무수한 스텝들의 배려를 느낀다.”



그의 언어는 많은 사람을 담고 있다. 동료 가수부터, 오디션 장 밖을 서성일 다른 음악인, 그리고 무대 밖에서 고생하는 스텝들까지. 내 코가 석자인, 이기는 것만 생각해도 숨 가쁜 오디션 현장에서 갖기 힘든 말도 안 되는 태도. 이성복 시인이 말했듯 이것이 '시'가 아니고 무엇인가. 이러니 '타인을 향해 신발을 돌려놓듯' 말을 건네는 30호 가수에 빠질 수밖에.




# 노래 대신 인터뷰에 빠진, 빠순이

이 무명의 30호 가수는 지난해 싱어게인 초대 우승자가 된 이승윤 가수다. 노래도 좋지만 말맛에 빠져 유튜브 영상을 찾아보곤 했다. (봉준호 감독의 시의 적절하고 위트 넘치는 시상식 인터뷰에 감동받던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혹시, 허세인가 싶어 유튜브를 보다가 재미난 영상을 발견하고 말았으니. 3년 전, 지금보다 더더더 찐 무명이던 시절, 광고 영상을 찍는 사람에게 길거리 인터뷰를 당한다. 인터뷰가 끝나갈 무렵, 반대로 그가 질문한다.



“그런데 너는 왜 이런 걸 찍어?”

인터뷰어는 광고 회사에서 광고주에 맞춰 찍다 보니 갈증이 생겨 촬영하고 있다고 답한다. 그러자, 30호 가수는 이런 말을 보태며 공감한다.

“내가 너의 갈증을 조금이라도 풀어주면 좋겠다”

이번엔 인터뷰어가 같은 질문을 30호 가수에게 던진다. 너는 왜 음악을 하느냐고.

“나도 이유가 거창하면 좋겠는데, 난 그런 게 없어. 그냥 하고 싶어서........”



허세인 줄 알았던 그의 말은 3년 전 인터뷰와 같은 색이다. 살짝 의심했지만 멋있어 보이려고 갑자기 툭 나온 인터뷰가 아니라 꾹꾹 눌러서 담아두었던 진짜 속 이야기가 흘러나온 거였던걸 알았다. 만약, 계속 이기는 삶만 살았다면 필요가 없었을 수많은 질문들. '나는 왜 음악을 하나? 난 깜냥인가? 난 어떤 음악을 해야 하지? 내 음악을 누가 좋아할까?' 안되니까, 실패하니까, 갈등하니까,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하는 것 사이에서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스스로 피하고 싶었을 질문에 답을 찾는 과정이 언어로, 노래로 쌓인 것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나는 노래보다 인터뷰에 반해 늦바람 난 빠순이가 되었다!!!




# 세월 앞에, 다크 하거나 라이트 하거나

30호뿐 아니라 경연자들의 대결을 지켜보며 미묘한 ‘차이'가 느껴졌다. 다크 하거나! 라이트 하거나! 좋아하는 음악 앞에서 살아온 ‘세월의 더께’만큼 다른 표정이 깃들어 있다. 해맑은 20대의 63호 가수. 세월의 더께가 앉지 않은 ‘순진’한 얼굴은 보는 동안 내 마음도 두둥실 가벼워진다. 반면, 펌 라인의 40대 아저씨 가수들에겐 20대의 경쾌함 대신 주름진 인생‘짠 내’가 전해져 공감이 된다. “아~ 나머지는 잘 모르겠고, 나 지금 이 순간 노래해서 행복해”라는 짠 내 나는 행복함! 처음엔 음악만 좋아해도 되는 20대의 깃털 같이 가벼운 얼굴이 좋아 보였다. 하지만 갈수록 세상과 불협화음을 내며 진짜 자신을 찾아간 중년 가수들의 '고단한 행복'에 더 마음이 갔다. 한 가지 색만 고집할 수 없었을 고단한 세월. 그렇게 세월 앞에 어릴 때의 ‘순진’함은 잃었겠지만 좀 더 단단한 ‘순수’함을 지켜온 세월을 리스펙 한다.




# 순진과 순수, 그 사이에서

순진과 순수 그 사이는 무엇일까. 내가 좋아하는 책들에서 발견한 것들이 답이 되지 않을까 싶다. 오래 산 경험에서 말하는 하밀 할아버지와 김소연 작가는 마치 한 마음이었던 듯 입을 모아, 다른 듯 같은 말을 건넨다.

"완전히 희거나 검은 것은 없단다. 흰색은 흔히 그 안에 검은색을 숨기고 있고, 검은색은 흰색을 포함하고 있는 거지. 오래 산 경험에서 나온 말이란다"
- 에밀 아자르, ≪자기 앞의 생≫ -
"순진함은 때가 묻지 않은 상태다. ……. 반면, 순수함은 묻은 때를 털어낸 상태다. 순수함은 순수한 스스로에게도, 연루된 사람에게도 약이 될 때가 많다."
- 김소연, ≪마음 사전≫ -


그래, 순수함은 묻은 때를 털어낸 상태다


오랜 산 경험에서 하밀 할아버지는 세월 앞에서 완전히 희거나 완전히 검은 것은 없다고 말한다. ‘순수’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묻지 않는 상태라 아니라 세상의 때를 툭툭 털어내며 자기를 지키는 일임을 잊지 말라고. 나는 어쩌면 가짜 ‘순수’만 그리워한 건 아닌지 모르겠다. 진짜 ‘순수’는 홀로 청정한 척 아무것도 안 묻히거나 안 섞이는 게 아니라, 묻은 때를 툭툭 털어내면서 내 것을 단단히 지켜내는 일이라는 걸. 솔직히 인정하지 않았다. 아니, 모르는 척했다. ‘짠 내’ 가득하더라도 진짜 ‘순수’가 무엇인지 그들의 짠 내 나는 노래에서 한 수 배운다. 늦바람 난 빠순이의 고백이다. (끝.)


“순진함은 때가 묻지 않은 상태다. 반면, 순수함은 묻은 때를 털어낸 상태다. 순수함은 순수한 스스로에게도, 연루된 사람에게도 약이 될 때가 많다. “
- 김소연, ≪마음 사전≫
keyword
이전 09화나이 든다면 윤여정 배우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