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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에 이름을 지어다 먹일래

드라마 <청춘시대>의 그 문장


회사원이 될 거야. 죽을 만큼 노력해서 평범해질 거야.
난 지금 평범 이하다.
- 드라마 <청춘시대>-



# 절대 평범해지지 않을 거야.

전혜린 작가의 이 문장은 나의 만트라였다. 노트 곳곳에 써 놓았던 그녀의 문장들. 기분 안 좋은 날이면 그녀의 에세이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를 펴놓고 좋아하는 구절을 반복해 읽으며 그녀를 꿈꿨다. 평범해지면 끝이라는 허세 가득한 생각을 했던 날들. 그녀의 책 속에 등장하는 뮌헨, 가스등, 독일 소시지, 보헤미안 같은 파편적인 이국적인 단어들이 ‘평범’과 반대되는 말로 여겼던 때라 제2 외국어로 독어를 선택하고 독일 친구와 펜팔을 시작한 것도 '그녀처럼'이라는 꿈이 있어서였다. 미국은 안 궁금했지만 독일은 선망의 나라였던 나. 그건 순전히 전혜린 작가 탓이다. 하지만 현실은 외국어 하나도 마스터 못 하고 유학 생활도 한 번 못해본 채, ‘가늘고 길고 평범하게’가 삶의 모토가 된 지 오래다.



# 죽을 만큼 노력해서 평범해질 거야.

"회사원이 될 거야. 죽을 만큼 노력해서 평범해질 거야. 난 지금 평범 이하다." 박연선 작가의 드라마 <청춘시대>에 나오 이 대사. 악으로 깡으로 학업과 알바를 병행하며 겨우 버티며 존버 하는 고학생 윤진명의 대사로 한예리 배우가 연기했다. 그렇게 열심히 살면서 '꿈이, 겨우 회사원'이냐고 친구들이 옆에서 비웃었지만 그녀의 꿈은 '평범'이라고 말한다. 나도 처음에는 피식 웃으며 겨우 꿈이 그거?라고 했다가 문득 생각한다. ‘평범’이란 단어를 함부로 굴리면 안 되는 게 아니었을까. 어쩌면 드라마 대사처럼, 죽을 만큼 노력해야 얻어지는 게 ‘평범’이라는 열매일 텐데 그동안 난 왜 '평범'을 우습게 생각했나 몰라. 평범까지 가는 것도 얼마나 힘든 일인데.... 그런데 왜 평범이란 단어에는 욕하는 냄새가 나는 건지.



# 평범의 냄새가 어렴풋이

무시하던 ‘평범’의 냄새를 어렴풋이 느낀 건 대학 1학년 때쯤, 그 아이를 만나면서다. 컴퓨터를 사야 하는 데 물어볼 곳도 마땅치 않고 같이 갈 사람도 없어 고민하는 나를 보고 엄마가 응식이랑 같이 가보라고 하셨다. 마침 그 애가 전자공학과를 들어갔으니 잘 알 거라고. 응식이는 '엄마 친구 아들'. 우리는 초등학교를 같이 다니고 회사 사택에서 같이 살았던 친구사이였다. 그동안 소식만 듣고 거의 본 적이 없었지만 대학생이 되어 다시 만났고, 컴퓨터를 사러 용산 전자상가를 같이 가는 사이가 되었다. 어색, 또 어색. 188cm인 그 애와 엄청난 키 차이 때문에 대화의 절반은 허공으로 날아가는 바람에 세상 불편한 대화. 더 힘든 건 전혀 친절하지 않은 그 애의 태도. 그 애도 엄마 때문에 갑자기 불려 나와 툴툴대는 느낌이었는데 그럴만했다.



# 응식이 동생 용식이

응식이는 평범한 대학생이었지만 응식이 형제는 어떤 면에서는 평범하지 않았다. 응식이 동생 용식이는 어릴 때 고열에 시달린 이후 장애를 갖게 되었다. 초등학교는 같이 다녔지만, 중학교부터는 특수학교로, 또 특수직업학교를 다니면서 얼굴을 볼 기회는 없었다. 가끔, 우리 집에 놀러 오셨을 때 평범한 우리 남매를 부러워하며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줌마의 눈을 난 기억 한다. 아마 내 친구 응식이는 부모와 다른 사람들에게 그런 눈빛을 받았을지 모른다. 평범한 자신과 평범하지 않은 동생을 오가는 눈빛. 무의식적으로 내뱉었을 어른들의 탄식. 내겐 상상밖의 영역이지만 응식이는 아마도 그런 어른들의 기대와 마음의 짐을 동시에 지니면서 자랐을지 모르겠다. 내 기억 속에 그 아이는 친절하지 않은, 성격 나쁜 아이로만 남아있지만. (미안하다!)




# 아줌마의 소원카드, 평범

아버지들의 직장도, 종교도 같고 엄마들끼리는 대모와 대녀의 끈끈한 사이에다 심지어 이사도 같은 지역으로 다녔을 만큼 우리들은 비슷한 환경에서 자랐건만 그 하나가 달랐기에 아줌마가 그토록 바라던 '평범'에서 한 걸음씩 멀어지게 되었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가끔씩 내 친구 응식이의 소식을 듣는다. 역시 내 예상대로 그 아이는 안정된 직장에다 장가도 잘 가서 야무지게 평범한 생활을 잘하고 있단다. 동생 용식이 소식도 듣는다. 동생 용식이는 직업학교에서 기숙사 생활도 하고 돈도 벌면서 주말이면 부모님 집으로 온다는데, 그 부모님 나이가 여든 고개를 넘어가고 있다. 아줌마는 지금도 입버릇처럼 '용식이보다 하루만 더 살고 싶다'라고 하시는데 과연 그 소원이 이뤄질지 모르겠다. 세월이 흘러도 아줌마가 그토록 원했던 '평범'에 이르는 길은, 여전히 고단한 길인 듯 싶다.




# 평범에 귀한 이름을 지어다 먹일래

허세 가득한 어린 날은 몰랐지만 평범은 절대 평범하지 않다. 어떤 사람에겐 평범한 일이 다른 사람에겐 죽을 만큼 노력해야 얻을 수 있는 일일지 모르고, 나의 평범함이 누군가에겐 '사치'일 수 있다. 나의 평범과 너의 평범은 이토록 다른 것이라면, 평범이란 말을 함부로 쓰면 안 될 것 같다. 평범은, 가운데 허리를 뚝 잘라 쓰는 수치인 ‘평균’이 아니고 목표에서 '조금 모자란 존재'도 아니며, 아무 노력도 안 하고 가만히 주어지는 '공짜 의자'는 더더욱 아니니까. 가장 보통의 존재가 되는 일. 드라마 속 윤진명의 대사처럼 우리가 원하는 '평범은 기를 쓰고 노력해야 얻을 수 있는 것'인데 어쩌다 ‘평범’이란 헐값의 이름을 갖게 된 걸까? 평범이란 이름이 낳은 수많은 오해를 지켜보며, 평범에 귀한 이름을 지어다 며칠을 먹이고 (박준 시인의 시 제목처럼) 귀한 대접을 하고 싶다. 그리고 나도 그 귀하디 귀한 ‘평범’한 존재로 잘살고 싶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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