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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파를 썰었다

하루와 하루 사이

by 강이랑 Mar 08. 2025


수목원이 있는 도서관에 책을 반납해야 해서 오후에 집을 나섰다. 바람이 시원했다. 반팔을 입고 농구를 하는 학생들도 보였다.


수목원에는 파란 새싹이 돋고, 복수초가 피었고, 황금빛 크로커스 꽃이 피어있었다. 그리고 봄바람을 쏘이러 나온 가족들이 많았다.



바싹 마른 잎사귀 틈 사위로 올라온 초록 나무 잎사귀도 싱그러웠다.


그리고 지난 여름 푸르게 푸르게 피어오른 후 겨울을 맞이한 화초와 떨어진 나무 잎사귀도 아름다웠다.


도서관 안은 포근했고 그림책 코너에는 아이들이 많았다. 나는 도서관에 책을 반납하고 봄기운 감도는 수목원 안을 돌아다녔다.


수목원을 나와 길을 걷는데 오늘은 왠지 이대로 어디까지나 걸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발걸음은 집을 향했다.

도로 길고 좁은 인도를 걸어 집으로 돌아온 나는 어제 시장에서 사둔 대파 한 뭉치를 꺼냈다. 대파는 모두 8개 들어있었고, 굵기가 각기 달랐으며, 가격은 2,500원이었다. 오늘 내가 할 일은 이 대파를 깨끗이 씻어 정성을 다 해 썰어 샐러드 만들 때 넣어 먹을 생각이고, 또 된장국에도 넣어 먹고, 라면에도 넣어 먹을 생각이다.


보통 때 같으면 파용 전용 비닐봉지 채로 시원한 곳에 두고 필요할 때마다 하나씩 하나씩 꺼내 쓰는데, 오늘은 대파를 잘게 썰어 냉장고에 넣어두었다가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래서 대파를 썰었다. 송송송 썰었다. 많이 썰었다. 굵은 대파 하나만 썰어도 도마 위로 가득했고 두 개를 썰으면 중간 크기의 통이 가득 찼다. 참으로 옹골진 대파였다.

전부 다 썰었더니 세 통이나 나왔다. 은근 인내를 요하는 작업이었다. 논문 쓸 때 각주 작업을 하거나 참고문헌 작업을 하는 듯한 세세한 마음가짐과 손놀림을 요했다. 그래서 며칠 전에 논문 작업 하나를 마치고 편의점에서 두 캔 사와 남겨둔 맥주 캔 하나를 땄다.


맛있었다. 이 컵은 일본에 갔을 때 친구가 준 하야시 아키코의 그림책 <달님 안녕> 캐릭터 컵이다. 나는 오늘 오전에 이 컵에 카페라테를 타서 마셨었다.


둘 다 거품이 가득하다.


맥주를 부은 컵에서 쪼르륵 맥주 한 방울 떨어진다. 마치 "히잉, 나만 혹사해. 이랬다 저랬다 정신없다고, 히잉." 우는 것만 같다.


아, 대파 하나도 다양한 용도로 자기 몫을 다하고, 울고 있는 컵도 다양한 용도로 자기 몫을 다하는데, 나는 갑자기 자괴감이 든다. 안 되겠다, 라면 물을 올리자. 계란 풀고 썰어둔 대파 한가득 넣어 먹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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