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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이랑 Aug 14. 2018

<동화로 떠나는 내면 여행-일본동화읽기➃>

나로 서기 위한 몸부림, 그래도 내가 해야 할 몸부림

『신들이 사는 숲 속에서』(오카 슈조 글, 이윤엽 그림, 김정화 옮김, 웅진주니어, 2010)          

                                                                    

1. 나는 자립 했는가?

  누군가 나에게 또는 내가 나에게 ‘자립’ 했는가? 라고 묻는다면, 나는 ‘아니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오카 슈조가 쓴 『신들이 사는 숲 속에서』(오카 슈조 글, 이윤엽 그림, 김정화 옮김, 2010)라는 동화를 읽고 나면 더욱더 자립이라는 말을 쉽게 입에 올리지 못 하리라. 이 동화가 ‘고립’을 통한 ‘자립’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들이 사는 숲 속에서』는 진지한 작품이다. 생존에 대한 문제가 나오고, 동물과 인간 공존을 이야기한다. 거기다 환경을 파괴하고 이를 묵인하거나 동물을 죽인 인간들을 재판하는 이야기가 나오고, 제도라는 시스템 속에서 자기를 잃고 살아가던 소년, 소녀가 신들이 사는 숲 속 원시 공간인 ‘자연 목장’ 속으로 끌려가는 이야기가 나온다.




  주인공은 가와다 다이스케라고 하는 초등학교 5학년 소년이다. 소년은 가을 연휴를 맞아 찾아간 아버지의 고향에서 사촌들과 야생 원숭이를 보러 산에 올라갔다가 길을 잃고 산 속에 고립된다. 다이스케 소년의 시점과 입장에서 이야기가 전개되지만 또 다른 주요 등장인물로 오마치 요시코가 나온다. 요시코는 어머니와 산에 버섯을 따러 왔다가 우연히 발견한 산토끼를 쫓아가다 산 속에 고립된다.




 작품론적인 관점에서 볼 때 『신들이 사는 숲 속에서』는 주제가 선행된 작품이다. 각 인물들은 입체적이라기보다는 강조된 주제 속에서 착실하게 움직이는 하나의 전형화된 캐릭터의 모습을 띤다. 다이스케와 마찬가지로 초등학교 5학년인 요시코는 죽을지 살지 모를 상황에서도 유명 사립 중학교 입시가 걱정이다. 현실 논리 속에 갇혀 사는 아이로 등장한다.  
  따라서『신들이 사는 숲 속에서』는 다이스케와 요시코가 지금까지의 자신들 모습을 되돌아보고, 올바른 자아를 확립하기 위한 자립에 관한 이야기로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이들 소년, 소녀가 겪는 고된 여정은 우리들 각자의 삶 속으로 스며들어와 우리들 내면을 건드린다.      

   

2. 재판에 처해진 존재들, 그리고 나와 우리

  『신들이 사는 숲 속에서』는 2부 구조로 되어있다. 산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잡혀온 인간들이 동물들에게 인간 재판을 받는 과정과 신들이 사는 숲 속인 ‘자연 목장’에서의 생활이다. 다이스케는 재판을 받기까지 굴 속에 갇힌다. 
  다이스케는 굴 속에서 또다른 주요 등장인물인 마키노 료사쿠라고 하는 전직 노교수, 그리고 요시코와 함께 지낸다. 마키노 노인은 등산 중 행방불명이 되어 다이스케보다 먼저 붙잡혀 굴 속에서 재판을 기다리고 있는 인물이다. 동물들 재판을 통해 이들 셋은 모두 ‘자연 목장’행이란 선고를 받는다. 
  애초에 이들은 왜 재판에 처해졌을까? 예를 들어 다른 등장인물인 폭주족 젊은이라든가, 농부 부부는 동물들을 죽이고 해를 입힌 ‘잔인한 범죄’를 저질렀지만 마키노 노인을 비롯한 다이스케와 요시코는 이들과는 달라보인다. 그런데도 이들 또한 고행이 기다리고 있는 자연목장행 선고를 받는다.  

    



  마키노 노인이 지은 죄에 대해 동물들은 ‘아무것도 안 한 죄’라고 말한다. 자연이 파괴당하고, 동물들이 죽어가고, 환경이 오염되어 가는데도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은 것이 죄라는 것이다. 마키노 노인은 “이런 말도 안 돼.(…) 나는 자동차 배기가스도 마음에 걸려서 가스가 적은 차를 타고 다니고, 마구잡이로 골프장을 만드는 것도 마땅찮아서 골프도 안쳤다고. 그리고 날개를 다친 새를 구해 준 적도 있고 도둑고양이한테 먹이를 준 적도 셀 수 없이 많단 말이야.(p98)”라고 반박한다. 그러자 동물들은 “(…) 너는 마음에 걸렸고, 마땅찮았다고 했지만 그것을 행동으로 보여 준 적은 없었어. 생각은 그렇게 했는지 몰라도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어. 연구실에서 그저 묵묵히 자기 할 일만하고 있었다고. 당신 연구는 대체 무엇을 위한 연구였지? 그저 당신은 자기가 좋은 일만 하면서 만족하고 살았지.(p99) ”라고 반문한다. 여기서의 동물들의 이 말은 화살이 되어 곧바로 나를 향해 날아온다. 마키노 노인은 바로 내 모습으로 중첩된다. 그렇게 보면 나 또한 자연 목장행이다.
  그렇다면 다이스케와 요시코가 지은 죄는 어떤 죄일까.


 “(…) 이 지구에 살아 있는 모든 존재들이 서로 의지하며 산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죄입니다. (…) 배움이란 지식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지혜를 배우는 것입니다.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지혜 말입니다. 자기 일은 자기가 할 수 있는 힘을 키우고 주위에 힘없는 자를 도와주거나 남에게 도움이 되는 공부를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배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자신의 행복만을 위해 공부합니다. 그저 좋은 학교에 가기 위한, 시험을 치르기 위한 공부에 세월을 허비하고 있습니다. 그 공부라는 것도 점수만 중요하고, 실제 생활에서 어떻게 쓰이는지는 안중에 없으니 우리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학문인 셈이지요. (…)
아이들은 다음 세대를 짊어질 인간입니다. 아이들이 제대로 된 생각을 갖지 않으면 우리는 앞으로도 죽느냐 사느냐의 다툼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자연 목장에서 교육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들이 사는 숲 속에서』, p100-101)


  다이스케와 요시코가 교육을 통해 스스로의 힘을 키우고 타자에게 도움을 주고자 하는 공부가 아닌 이기적이고 현실 논리에 갇혀 지혜로운 사고력을 키우지 못한 것을 그 죄명으로 밝히고 있다. 어찌 이 죄명 또한 이 아이들에게만 해당하겠는가. 곧바로 우리 모두를 향해 날아온다. 도대체 여기서 벗어날 사람 그 얼마나 되겠는가. 이런 의미에서 우리 또한 모두 ‘자연 목장’ 행일지라. 
 
3. 고립 속에서 찾은 자립 
  정체를 알 수 없는 장소, 자연 목장 행을 두려워하고 거부하는 다이스케와 요시코에게 “(…)우리 자연 목장에 오너라. 인간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다시 한 번 자기를 되돌아보도록 하여라. (p105)” 라고 동물의 신은 말한다. 
  그렇다면,『신들이 사는 숲 속에서』에서의 ‘자연 목장’은 도대체 어떤 곳이란 말인가. 다시 모두와 헤어져 혼자 고립된 다이스케가 앞으로 살아갈 자연목장은 “(…)드넓은 벌판에 저 멀리 일자로 외길이 뻗어(p146)”있는 곳이다.


가도 가도 아무도 만나지 못했다. 집도 보이지 않았다. 군데군데 보이는 크지 않은 나무나 덤불 외에는 그저 넓은 벌판이었다. 나는 피곤하면 나무 그늘 밑에서 쉬었다. 물과 음식은 참을 수 있을 만큼 참았다. 앞으로 언제 먹을 것을 구할 수 있을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한여름 만큼은 아니었지만 태양은 하루 종일 내리쪼였다.(…)누군가를 만나고 싶었고, 나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걸 찾고 싶었다. 그래서 포기하고 싶은 마음을 달래며 계속 걸었다. 그러나 결국 아무도, 아무것도 만나지 못했다. 맥이 빠져서 해가 떨어지기 전에 걷기를 멈추고 밖에서 잘 준비를 했다.
해가 떨어지자 갑자기 추워졌다. (『신들이 사는 숲 속에서』, p146-147)


  다른 사람의 자취는 물론이고 동물의 자취도 쉽사리 찾아 볼 수 없는 그저 황망한 허허 벌판이다. 거기다 낮에는 덥고 밤이 되면 추워져 거처할 곳도, 물도, 식량도 찾기 어려운 곳이다. 이러한 곳에 홀로 내팽개쳐진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두렵다. 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너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자문하고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동화 속에서의 다이스케는 마른풀을 모아 만든 잠자리에 누워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부모 생각이 나 울기도 하고, 물과 식량을 아끼고, 그리고 걷고 또 걷는다. 죽음을 생각하고, 걷는 것조차 포기하고, 환청을 듣고, 허기에 시달린다. 그러면서도 다이스케는 죽을힘을 다해 다시 걸어서 드디어 샘물을 발견한다.
 
여기에 살자. 이 샘터에 집을 짓자. 여기 있으면 물도, 먹을 것도 구할 수 있다. 여기를 터전으로 삼고 두 사람을 찾아보자.
희망이 불끈 솟았다. 살아갈 목표가 생기자 힘이 솟아올랐다.
다행히 샘터 옆에 커다란 바위가 있었고, 바위 밑은 내가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움푹하게 패어 있었다. 당분간 여기서 자기로 결심했다.(…)
나는 여기서 무엇을 먹고 살아가야 할까? 동물들을 잡아먹으면 다시 죄를 짓는 걸까? (『신들이 사는 숲 속에서』, p152)


  고립 속에서 다이스케는 스스로 생각하여, 해결해간다. 살아남기 위해 동물을 잡아먹고, 석기를 만들고,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고독한 생활을 이어가며 삶을 연명한다.


지난 한 달 동안 몇 번이나 울었을까. 처음에는 외롭고 힘들어서 울었다. 나중에는 분하고 슬퍼서 울었다. 나는 몸도 마음도 너무 약했다. 무슨 일을 하든 금방 피곤하고 금방 하기 싫어졌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자, 나는 나 자신을 격려하는 수밖에 없었다. 일이 익숙해지면서 손바닥 굳은살이 딱딱해지고 몸도 점점 튼튼해졌다. 나는 하루하루 단련되어 갔다.
집을 다 짓고 나서 며칠 동안은 다시 돌로 도구를 만들며 지냈다. 돌칼, 돌망치, 돌창, 그리고 무른돌로 그릇도 만들었다. (『신들이 사는 숲 속에서』, p158-159)


  다이스케가 이처럼 고립 속에서 자립의 길을 걷고 있을 때 또 다른 주요 등장인물인 요시코는 어떨까? 다행히도 요시코는 다이스케처럼 처음부터 절대 고독이나 고립에 처해지지는 않는다. 다 죽어가던 요시코는 한 노인에 의해 구조된다. 그 후 요시코는 노인으로부터 삶의 지혜를 배운다. 요시코가 자립의 길로 들어서는 시작점은 다이스케에 비해 늦었지만 함께 살던 노인이 자연 목장을 떠난 뒤 혼자 남아 자신의 발, 자신의 손, 스스로의 생각을 통해 자립의 길로 들어선다. 
  죽음을 무릅쓰고 찾아온 다이스케가 “너, 중학교 못 가서 어떡해?(p201)”라며 묻자 요시코는 “나 말이야, 지금은 어디에 가서도 혼자 살아갈 자신 있어. 그때 그대로 중학교에 갔더라면 이런 자신감이나 힘이 생겼을까.(p201)”라고 반문한다. 자연목장에서의 체험을 통해 자신 안에 내재한 힘을 자각하고 발현한 것이다. 이로써 현실논리 속에 갇혀 살던 요시코 또한 진정한 자립의 과정을 겪고, 힘을 획득한 것이다. 


4. 그리고 다시 함께 하는 삶 
  숲 속에서 길을 잃었던 소년 다이스케는 우리들이 사는 세상 속으로 다시 돌아온다.


나는 깊은 숲 속에서 발견되었다고 했다. 버섯을 따러 온 동네 아저씨가 큰 나무 구멍 속에 웅크리고 있던 나를 찾아냈다.
없어졌을 때 차림 그대로였고, 아저씨가 말을 걸자 꿈에서 깬 듯한 표정을 지었다고 했다. 까칠해진 기색도 없었고 걸음걸이도 씩씩해서 아저씨는 신문과 텔레비전에 시끄럽게 나오던 행방불명된 아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고 했다. (『신들이 사는 숲 속에서』, p224)


  그러면서 다이스케 소년은 “나는 자연 목장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포기하거나 주저앉고 싶을 때 자연 목장에서 배운 것을 떠올리며 기운을 북돋울 것이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신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이 땅과, 이 땅에 사는 살아 있는 모든 것들에게 가만히 귀를 기울이며 살아갈 것이다.(p227)”라고 다짐한다.  
  나는 여기서 또 한번 되묻는다. 그럼 너는 자립을 했느냐고. 나는 ‘다이스케처럼은 아니다’라고 답할 것이다. 다이스케는 고독하고 힘든 자연 목장에서의 삶을 살아내고, 그 체험을 자기 안에서 녹여내어, 이 땅에서 다시 살아가기 위해 견고한 또 다른 모습으로 소생한 것처럼 보인다. 
  옛이야기나 신화 등을 보면, 주인공이 자기를 찾기 위해 고된 여정을 떠나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이러한 자기 찾기 과정은 각자의 인생에 있어서 여러 시기에 반복될 수도 있고, 통과의례처럼 어떠한 특정한 시기에 아무런 예고 없이 불현듯 찾아올 수도 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여러 번 찾아오든, 어떤 특정 시기에 찾아오든, 나에게 찾아오든, 너에게 찾아오든 언제나, 누구에게나 고통과 시련이 따른다는 점 그리고 어떨 때는 위험을 수반한다는 점이다. 
  『신들이 사는 숲 속에서』의 ‘자연 목장’이라는 시공간은 죽음과 소생이 언제나 들러붙어있다. 너는 어디로 갈 것인가? 죽음의 길로 갈 것인가? 소생의 길로 갈 것인가? 죽음의 위기에 직면할 때마다 다이스케는 자신에게 되묻는다.

 

너는 여기서 포기하겠다는 거야? 아무도 모르고, 아무도 찾아내지 못하는 여기서 죽겠다는 거냐고! 그래도 괜찮은 거지? 네가 이 세상에서 사라져도 세상은 어제와 다름없이 돌아갈 거야. 너 하나 없어지는 건 벌레 한 마리 죽는 거나 마찬가지야. (…) 그리고 넌 고작 10년 만에 네 인생이 끝나도 상관없어?
“아니야!”
나는 소리쳤다. (『신들이 사는 숲 속에서』, p148-149)


  다이스케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북돋우는 과정을 겪고 있다. 어떠한 고통 속에 빠져있더라도 살아나기 위해 자문하고 답을 하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다이스케 소년이 우리들에게 보여주는데, 그는 여기서 10세이다. 도쿄에서 태어난 다이스케는 자연 목장에 고립되어 홀로 살아가는 삶을 통해 “혼자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가스, 수도, 전기도 없고, 식량이나 옷까지 스스로 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곳에서 살아가는 건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p190)”라며 처음 자연 목장에 왔을 때의 모습을 떠올리면서도, “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혼자 살아온 것은 아니라는 걸 안다. 나는 많은 동물들을 죽였고 그 목숨들 덕분에 살아왔다.(p190)”라며 자기가 처한 상황과 자기를 둘러싼 여건을 직시하고자 한다. 그리고는 “아빠 엄마도 내 힘으로 살았다는 것을 알면 틀림없이 놀라실 텐데……. 아빠는 뭐라고 나를 칭찬해 주실까? 엄마는 뭐라고 하면서 나를 안아 주실까? 아아, 그 말을 듣고 싶어. 엄마를 한 번만이라도 만나고 싶어.(p191)”라며, 모두와 함께 하는 삶을 갈망한다. 동화를 통해 보아온 다이스케라면 모두와 함께 하는 삶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공존하며 홀로 존재할 수 있으리라.
    
5. 열 살 기억의 소환, 그 의미  
  다이스케와 요시코는 5학년으로 만 10세의 나이이다. 일본에서는 10세(여기서는 만이 아님)를 20세에 치르는 성인식의 절반이라는 의미에서 ‘2분의 1 성인식’이라 부르기도 한다. 1980년대 일본의 한 초등학교에서 시작된 ‘2분의 1 성인식’이라는 행사는 초등학교 4학년, 10세를 맞이한 어린이가 지금까지의 자신을 돌아보고, 앞으로의 삶을 살펴본다는 취지에서 시작되어 2000년대 이후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일본 아동문학 동화책 제목으로 『2분의 1 성인식(2分の1成人式)』(井上林子 文, 新井陽次郎 絵, 講談社, 2015)이 나올 정도이다. 이노우에 링코(井上林子)가 쓴 이 동화는 초등학교 4학년인 유메라고 하는 여자아이가 ‘장래의 꿈’, ‘스무 살의 나에게 보내는 편지’ 등 문집에 들어갈 글을 쓰면서 지금까지의 자신을 돌아보며 자기 주변의 소중한 존재, 자기 자신이 앞으로 진정으로 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지를 자각해 가는 모습을 담고 있다. 이 동화책 띠 표지에 ‘2분의 1 성인식’을 “새로운 학교 행사”로 기술하고 있다.

           


 
  이처럼 동화책으로도 등장하는 등 새로운 학교 행사로 화제가 된 ‘2분의 1 성인식’이지만 행사의 주최가 학교라는 점, 행사 내용 중 하나인 부모에 대한 감사 편지 쓰기 등이 선행하며, 어린이들이 글쓰기라는 작업을 통해 지금까지의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앞으로 건설적인 삶을 이어가고자 하는 본래의 취지가 희박해지며 비판을 샀다.                              



   『신들이 사는 숲 속에서』에서 다이스케와 요시코는 어쩌면 이러한 ‘2분의 1 성인식’을 치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도 학교 행사나 이벤트가 아닌 진정한 의미에서의 2분의 1 성인식을 말이다.
  하지만 10세가 되기도 전에 이러한 자연 목장 같은 곳에 내몰리고 방치된 현실 속 우리들 목숨들은 어찌되느냐고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한 상황에서는 통과의례와 자립을 말하기도 힘들 것이다. 『신들이 사는 숲 속에서』에서의 다이스케는 열 살이 될 때까지 어느 정도의 보호 속에서 살아왔다. 그 아이의 몸과 정신 속에는 십 년 동안의 축적된 힘이 존재했다. 그러한 힘을 바탕으로 원시 공간의 허허 벌판인 자연 목장에서 스스로 일어나 몸부림치면서도 살아낸 것이다.  
   『신들이 사는 숲 속에서』에서 다이스케와 요시코가 겪은 ‘고립’ 만큼은 아닐지라도 우리는 때때로 생활 속에서 고립감을 느낄 때가 있다. 이러한 고립감은 자립을 암시하는 하나의 신호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신들이 사는 숲 속에서』의 자연 목장에서 다이스케가 체험한 몸부림은 내가 나로 서기 위해서는 고통스럽고 힘들어도 내가 해야 할 몸부림인 것이다.                       



  우리는 초등학교 4학년이나 5학년 때, 이 세상에 오직 나 혼자 뿐인 것 같은 고독감에 빠진 적이 있지 않은가. 내가 지금 열 살이라면 물론 좋다. 또는 내 아들이나 딸이 지금 마침 열 살이라면 이 역시 참으로 좋다. 또는 열 살 된 손주나 조카가 있어도 좋다. 그들 열 살 된 귀한 존재들과 먼저 이야기를 나누고, 그들과의 소통을 통해 내 안에 들어있는 열 살 때의 내 감각을 되돌릴 필요가 있다. 이들 열 살 내 딸과 아들, 손주 덕분에 나 또한 열 살 때의 그 시절로 돌아가 내 내면의 현실 속에서 존재하는 잊어버렸던 그때의 나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몸이 풀리는 준비가 갖추어졌다면 이제 내 안에 들어있는 내 열 살의 기억을 불러보자. 그 모습은 단순한 허상이 아닌 내가 실제로 체험했고, 지금은 내 내면에 저장된 뚜렷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열 살 감각을 소환하는 것은 내면의 건강성 회복과 탄탄한 자아의 재구축을 위해서이지만, 우리들 인생에 있어서 이 시기의 소환은 중요한 의미를 띤다. 예를 들면 일본 지부리에서 만든 애니메이션 중 다카하타 이사오(高畑勲) 감독의 『추억이 방울방울(おもひでぽろぽろ)』(1991)을 떠올릴 수 있다. 도쿄 태생의 27살 직장인 여성 다에코는 여름 휴가차 시골로 떠나는 여정에서 자신의 5학년 때 기억을 소환한다. 인생의 중요한 기로에 서있던 다에코는 5학년 때의 기억을 통해 지금까지의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고, 앞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살고 싶은지를 직시하고 인생의 중대한 선택을 한다. 이러한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준 이들이 바로 5학년 때의 자신과 한반 친구들이다.  



  또 다른 경우를 융의 경험을 통해서 들여다 볼 수 있다. 정신과의사, 분석심리학자, 대학을 비롯한 여러 강연 활동과 논문 집필 등으로 분주한 일상을 보내던 37세의 카를 융은 어느 날 신화적인 상상력을 자극하는 중요한 꿈들을 연달아 꾸게 되지만 무겁게 짓눌린 상태 속에서 꿈의 함의를 찾지 못하고 방향을 상실하고 만다. 신화적인 상상력이 막히는 심각한 심적 장애에 부딪힌 융은 어린 시절의 기억들을 되살린다.


처음 머리속에 떠오른 것은 열 살이나 열한 살쯤 되었을 어린시절의 추억이었다. 그 무렵 나는 벽돌로 집짓는 놀이에 열중했다.(…) 

 “아하, 여기에 삶이 있구나! 그 작은 아이는 여전히 여기에 있고, 내게 결여되어 있는 창조적인 삶을 누리고 있다. 그런데 나는 어떻게 거기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인가?”

현재 성인이 된 남자와 열한 살 소년을 서로 이어준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내가 그 시절과 다시 이어지기 위해서는 그곳으로 돌아가 아이의 놀이를 하면서 아이의 삶을 한번 더 살아볼 수 밖에 없었다.

이 순간이 내 운명의 전환점이었다.(카를 구스타프 융, A 야페 편집, 조성기 옮김, 『카를 융 기억 꿈 사상』, 김영사, 2007, p320-321)


  융은 이처럼 신화적인 상상력이 막히는 심적 장애에 부딪혔을 때 열 살에서 열한 살 때의 소년 시절에 즐겨했던 벽돌로 “작은 집과 성을 세우고 병으로 현관과 천장을 만(p320)”들며 놀았던 기억을 소환한다. 이를 통해 “나의 생각은 맑아지고 어렴풋이 느껴지는 환상을 붙잡을 수 있었다 (p321)”며 심리적 위기에서 벗어난다. 그 후로도 융은 똑같은 상황에 봉착할 때마다, “ 그림을 그리거나 돌을 다(p322)”룸으로써 장애에서 빠져나온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융 또한 열 살, 열한 살 기억을 소환했다는 점일 것이다.

   



  지금 내가 인생의 어떤 기로에 서있다면 내 안의 생생한 현실을 한번 소환해 보는 것은 어떨까. 장소는 나만의 무의식 세계여도 좋으리라. 옛이야기에 나오는 숲 속 시공간이어도 좋고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숲이나 산 속이어도 좋다. 또는 저 하늘 우주이거나 깊은 바다 속 심해여도 좋다. 각자의 열 살로 되돌아가, 그 시절의 나라면 어땠을까? 그 시절의 나의 자세에서 지금의 나를, 주변을 돌아다보는 것도 내가 앞으로 새로운 나이를 맞이할 때 건설적이지 않을까. 그래야 내가 바로 서고, 내가 나로 서면, 내 주변 또한 바로 인식하고 건강하게 바라보는 눈이 생기지 않을까.




  하지만 자연스럽게 생생한 감각을 일깨우기란 쉽지 않다. 그럴 때 『신들이 사는 숲 속에서』에서와 같은 이야기의 힘을 빌려도 되지 않을까. 우리가 판타지를 즐기는 이유도 이래서이지 않을까. 굳어버린 정신에 유연하면서도 생동하는 감각을 되살리고자 하는 욕망이 판타지를 불러들이는 것은 아닐까. 또는 열 살 소년소녀들의 유쾌한 일상을 그린 리얼리즘 동화 또한 좋으리라. 이러한 동화 속에는 내가 잠시 잊어버린 소년소녀 때의 건강한 ‘감성’과 약동하는 ‘시선’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가끔 일상에서 고독감을 느낄 때나, 길을 잃고 헤맬 때 동화책을 손에 들고 그 속에 빠져보는 것 그 자체가 지금의 나를 되돌아보고, 건강한 시선을 되찾기 위한 아주 작은 힌트가 될 수도 있으리라.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좋은 것은 그 때의 정신이 되어 나만의 놀이나, 내 동화를 내 손으로 직접 써보는 것일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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