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그림책 작가 사노 요코의 그림책 『태어난 아이』는 “태어나고 싶지 않아서 태어나지 않은 아이가” 우주를 떠돌다가, 지구에 와서 마침내 태어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림책 제목이 『태어난 아이』이기도 해서 그림책을 보지 않았을 때는 갓난아기나 영유아 아이를 떠올릴 수도 있겠으나, 이 그림책의 주인공은 막 태어난 갓난아기가 아닌 어린 소년이다. 여기서 “태어난 아이”란 자신만의 틀 속에서 벗어나 사람들로 복닥거리는 세상 속으로 한 발 나아가는 아이로서의 “태어난 아이”를 가리킨다.
공원에서 마주친 여자아이의 반려견과 주인공 소년을 따라온 개가 마찰을 일으키며, 소년은 팔과 다리를 물리는데 처음에는 “태어나지 않은 아이는 하나도 아프지 않았습니다. 태어나지 않았으니 아무 상관이 없었습니다.”라며 상처를 입었는데도 아프지 않다고 말한다. 하지만 어찌 아무렇지 않겠는가? 나도 개한테 물려봐서 아는데 보통 아픈 게 아니다.
『태어난 아이』의 이미지를 잘 살펴보면 엄마와 아이라고 하는 이자관계(二者關係) 외에도 아이 둘, 개 둘, 엄마 둘, 별꽃 둘, 태양과 달 등 둘이라고 하는 이자관계를 상징하는 모습이 도드라진다. 별 사이를 걸어 다니는 아이는 별에 부딪혀도 아프지 않고, 태양도 뜨겁지 않고, 간지럼도 안 타고, 배도 안 고파한다.
그러던 소년이 여자아이와 갈등을 일으키게 되고, 소년을 따라온 개한테 엉덩이를 물린 여자아이가 엄마에게 치료받는 모습을 보게 된다. 여자아이처럼 치료를 받고 싶어진 소년은 ‘반창고’와 ‘엄마’를 외치며 마침내 태어나게 된다. 치유를 바라며 간절하게 엄마를 찾고 엄마에게 안기는 이 장면에서 소년이 비로소 팔다리가 아파서 울음을 터뜨리는데, 그 모습을 지켜보는 나까지 울컥하는 그 무엇이 있다.
뭔가 억울하고 말도 안 되는 일을 겪었을 때 누군가에게 이르고 싶을 때가 있다.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을 때가 있다.
나 또한 어렸을 때 동네 친구와 호되게 싸운 적이 있다. 그 친구는 우리 집과 마주 보는 집에 사는 먼 친척뻘 되는 아이로 야무지고 아주 당차서 난 도저히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울고불고 돌아온 나를 위해 엄마는 두 팔을 걷어붙이고 싸운 친구네 집을 찾아갔더랬다. 별다른 큰일이 생긴 것은 아니었지만 단지 엄마가 나를 위해 나서 준 그것만으로도 나는 천군만마(千軍萬馬)를 얻은 듯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친구네 집으로 놀러 가 놀고, 한참 어른이 된 지금도 나는 이 친구와 연락하며 잘 지낸다.
숀 호머의 『라캉 읽기』를 보면, “타자의 이미지에 대한 동일시와 그 이미지와의 원초적인 경쟁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은 자아가 더욱 복잡한 사회 상황들로 나아가기 위한 변증법적 과정(p55)”이라는 문장이 나온다.
『태어난 아이』에서 소년은 갈등을 통해 자신만의 틀 속에서 벗어나 비로소 새로이 태어나 세상 속으로 나아간다. 새로 태어난 아이는 사람들로 복닥거리는 공원에서 여자아이를 보고 “내 반창고가 더 크다!”라고 큰소리로 자랑을 한다.
세상 속은 어쩌면 갈등이 없는 것보다 갈등이 있는 것이 일상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갈등은 해결하라고 있는 것이다. 갈등을 두려워 말고 갈등을 극복함으로써 우리는 다시 태어나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태어난 아이』처럼 ‘반창고’를 큰소리로 외치고, 붙여주는 존재가 필요하다. 그러한 가족이나 친구가 내 가까이에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갈등하고 부딪히면서도 어떻게든 다시 태어나 나아가고 또 다시 태어나 나아가 마침내는 나 스스로 “아 아프다. 많이 아프다”라고 말하면서 약을 바르고 ‘반창고’를 붙일 수 있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우리는 언제까지나 아이와 엄마라고 하는 이자관계 속에 머무를 수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