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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으로! 아주 작은 실행의 힘

by 국빈

취준 생활을 하고 있던 나에게, 오랜만에 온 친구의 연락은 그저 달갑지만은 않았다.


뭐하고 지냈냐는 말이 오고 가면서, 내 초라한 모습만 비칠 거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왕 만나기로 한 거 조금이라도 덜 초라해 보이고 싶은 마음에, "내 포부나 이야기하자" 하고

올해 도전해보고 싶은 일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있잖아, 나 올해는 일본의 노인시설을 방문해 볼까 해. "

"정말? 개인으로 컨택하는 거면 진짜 쉽지 않을 텐데.. 그래도 그런 생각을 하다니 대단하다."


친구의 '대단하다'라는 말을 듣고 나니, 나는 왠지 모르게 위안이 되었다. "한심해 보이지는 않겠구나" 하고 말이다. 신기하게도, 그렇게 말하고 나니, 마치 이미 견학을 하고, 목표를 이룬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아가 스스로 대단하다고 느끼는 착각에 빠졌다. 심지어 정작 실제로 행동해 볼 용기의 필요성은 느껴지지도 않았다. 이미 ‘이런 생각을 하는 나는 훌륭한 사람’이라는 만족감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후 친구의 이어지는 대답이 뇌리에 박혔다.

"좋아. 그럼 이제 행동하는 일만 남았네."


그 순간, 나는 내가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말로만 끝낼 것인가, 아니면 정말 움직일 것인가. 그건 나의 선택사항이었다.




며칠 후, 나는 도쿄 한 노인복지기관에 연락을 취했다.

기관 답변의 일부


한국보다 빠르게 초고령사회에 접어든 일본 노인의 삶을 직접 보고 싶었고, 노인복지 현장을 경험해보고 싶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문의를 했고, 다행히 방문이 가능하다는 답변을 받고 설레는 마음으로 준비를 시작했다. 한국에서 가져갈 선물을 챙기고, 방문 절차를 확인했다.


제일 까다로웠던 것은, 위생문제였다. 코로나 팬데믹 사태는 지나갔지만 여전히 음성 확인서가 필요했다. 어르신들의 공간이기에 더욱이 마스크 착용도 필수였고, 입장 전 손부터 씻어야 했다. 시설 내부의 방역 수칙이 철저하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처음 이곳을 방문하여 상담을 받을 때, 기관장은 나에게 견학을 통해 무엇을 얻어가고 싶은지 대해 물었다. 동시에 내게 약간의 경계심을 가진 듯 보였다. 낯선 방문자가 시설을 견학하고 싶다고 하니, 그것도 외국인의 입장이니 어쩌면 당연한 반응일 것이다.


이따다끼마스! (잘 먹겠습니다)


기관장의 주도로 시설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이곳에서 노인들에게 제공하는 서비스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특히, 실제로 제공되는 식사를 맛볼 기회도 있었는데, 그날의 메뉴는 고기와 각종 야채가 들어간 우동이었다.

맛있게, 그리고 감사한 마음으로 그릇을 비우고 다시 기관을 둘러보았다.


시설 내부는 매우 쾌적했다. 로비에는 어르신들이 직접 그린 그림이 전시되어 있었고, 그들의 삶과 감정을 엿볼 수 있는 공간처럼 느껴졌다.


특히, 걸을 수 있는 어르신들에게는 최대한 스스로 움직일 수 있도록 돕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휠체어를 사용하기보다 천천히라도 직접 걸으며 잔존 능력을 유지하도록 유도했다. 단순히 돌봄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어르신들이 가능한 한 독립적으로 생활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방식이었다.


설명이 거의 끝나갈 무렵, 기관장은 나에게 자신의 휴대폰 속 사진 한 장을 보여주었다.

"혹시 후쿠와라이(일본 전통 얼굴 맞추기 놀이)라고 알아요?"


출처 : 위키백과


"이것 좀 봐요! 내 얼굴을 가지고, 할머니들이 이렇게 우스꽝스럽게 만들어 놨지 뭐야!

너무 웃기지 않아요?"


사진 속 얼굴은 눈, 코, 입이 엉뚱한 위치에 놓여 있었다. 입이 있어야 할 자리엔 코가,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엔 입이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도, 기관장도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사실 나의 환한 웃음 속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어느샌가 나를 경계하던 분위기가 완전히 풀려 있었고, 이제는 서로 유쾌한 이야기, 그리고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저 행복했다.


대화는 무르익어 갔고 어르신들과 직원들의 노고, 그리고 노인시설 운영에 대한 깊이 있는 이야기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경계심이 허물어진 자리에는 신뢰와 따뜻함만이 남아 있었다.


마지막으로 나는 작은 답례로 가져온 한국 전통과자를 건넸고, 기관장은 직원들과 나누어 먹으며 나에게 화답했다. '정말 맛있어요!'


다소 어눌한 억양이었지만 한국어로 이야기해 주었음에 나는 더할 나위 없는 감사함을 느꼈고,

그 말투 속에서 그의 진심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돌아오는 길, 우연히 본 공원에서


일정을 모두 마치고 돌아오는 길,

한국에서 처음 친구와 나눈 대화가 다시 떠올랐다.

"좋아. 이제 행동하는 일만 남았네."


친구의 말 한마디가 나에게 끼친 영향은 강렬했다.


그렇게 나는 그 한 걸음을 내디뎠다.

아주 작은 행동이었지만, 그 행동 덕분에 나는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또 하나의 기록이 되었다.


결국, 인생을 바꾸는 것은 거창한 계획이 아니라, 아주 작은 실행의 힘인 걸까.


그리고 그 힘은, 결코 배신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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