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잘할 테니 얼른 일어나 주겠니?
예쁘다.
10살의 내가 마주한 플루트의 첫인상이었다. 은빛이 눈부시게 빛나는, 섬세한 어떤 것들로 구성되어 기다란 피리. 동그란 입을 납작하게 모아 그것을 불면 맑은 새소리가 난다. 그러면 연주하는 나조차도 아름다운 사람이 되는 기분이 든다.
니켈로 만들어진 연습용 악기를 2년 간 사용했다. 실력이 늘자 12살에 중급용 악기를 장만했다. 키 부분을 제외하고 전체가 실버로 되어 있어 더 따뜻하고 맑은 음색을 낼 수 있었다. 무엇보다 좋았던 건 선생님의 악기처럼 키에 구멍이 뚫린 Ring-keys였다는 점이다. 물론 선생님과 내 악기의 가격 차이는 10배 이상이었다. 링키는 예뻤지만, 손이 작았던 어린 나에게는 고난의 시작이었다. 키의 구멍을 손가락으로 제대로 막아야 하는데 손가락이 짧아서 구멍을 완전히 덮기가 어려웠다. 오픈 키에 적응할 수 있도록 키 플러그가 있었지만, 얼른 빼 버리고 싶었다. 차갑게도 세련된 이 악기에 실리콘 마개가 웬 말인가!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플루트를 깨운 건 지난 주였다. 우연히 오케스트라 모집 공고를 발견했다. '초보 연주자도 참여할 수 있는 오케스트라.' 간단한 지원서 양식을 제출해야 했는데 쓰고 보니 나의 지원서는 텍스트로 가득했다. 뭐랄까, 누가 내게 물어봐주기만을 바랬던 것처럼 과거의 화려한 플루트 경력을 늘어놓았다. 교내 음악 경연대회에서 매년 상을 탔고, 수석 플루트 연주자로 오케스트라 활동을 했다고. 쓰고 보니 20년도 더 된 일이라 조금 낯뜨거웠지만 내 자랑하는 건 너무 즐겁다. 뭐 어때.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구구절절 이야기를 늘어놓은 덕분인지 합격 통보를 받았다. 창고에 있던 플루트를 꺼냈다. 가죽으로 된 플루트 가방은 곰팡이 천지였다. 케이스를 열어보니 다행히 플루트는 그럭저럭 괜찮아 보였다. 그래서 불어보니, 소리는 결코 괜찮지 않았다. 부는 내가 다 듣기 싫은 쇳소리가 났다.
이건 분명히 악기 탓이야!
그래, 악기가 오래되었으니 점검이 필요하겠지. 오랜만에 낙원상가로 향했다. 작은 가게들이 옹기종기 모인 상가, 그 속에 오밀조밀 붙어있는 여러 악기들. 언제 보아도 사랑스럽다. 서점이 마음이 편안해지는 공간이라면, 악기 상점은 나를 설레게 하는 곳이다. 지금까지 쭉 이어오지 못한 악기 연주에 대한 열망이 컸기 때문일까. 아니면 오케스트라 활동 당시의 추억이 상기되기 때문일까. 여러 생각이 엉키면서 가슴이 두근거린다.
깨끗하네요. 패드도 문제없고. 기본 세척 정도만 하면 되겠어요.
뜻밖의 진단 결과. 전체 수리를 예상했었는데 세척만 하면 된다니! 가죽 가방이 곰팡이를 피우며 장렬히 전사한 보람이 있구나. 그리고 믿기 어려웠지만 쇳소리는 악기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며칠 후 새 가방과 함께 플루트를 집으로 모셔왔다. 기본 가죽 가방도 플루트를 이렇게나 잘 지켜주었는데, 기능성 소재 팍팍 들어간 알티에리는 얼마나 좋을까! 하며 구입했다. 사실 플루트 가방은 알티에리가 찐이라 멋있어서 사 왔다.
'입술이 저리는' 느낌을 받아본 적이 있는가? 플루트를 불면 자연스럽게 입술에 힘이 들어가는데 오랜만에 불어서 그런지 입가가 싸르르하니 저리고 곧 쥐가 날 것만 같다. 오랜만에 플루트를 잡으니 입, 어깨, 손목 안 아픈 곳이 없다. 어릴 때 기깔나게 불었던 소나타를 연주해본다. 고작 한 마디 만에 내가 이렇게 폐활량이 안 좋았나 탄식한다. 분명히 어릴 때는 한 호흡에 쉽게 불었던 것이, 지금은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난 술·담배도 안 하는 사람인데! 아, 그래도 하나 좋아진 부분이 있다. 성장한 나의 손가락이 오픈 키를 가볍게 막아낸다는 것.
여전히 잠들어 있는 플루트의 소리를 깨우고 있다. 굳었던 내 입술도 풀리고 있다. 매일 불다 보니 소리가 점점 좋아지고 있다. 행복하다. 플루트를 다시 불게 될 줄은 몰랐다. 오케스트라 단원이 될 줄은 더욱 몰랐다. 지금이 즐겁고 앞으로가 기대된다. 이래서 사는 게 재밌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