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하게 살아내보자고
무해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나는 어쩌면 애초에 그렇게 될 수도 없는 기질이다. 따지고 보면 좋으나 싫으나 늘 상처를 주는 쪽이었다. 삼킬 수 있는 말들을 기어코 뱉어내는 걸 보며 엄마는 누구 닮아서 이렇게 모지고 못됐냐고 나무랐다. 한 번은 아빠 생일에 고가의 선물을 산 적이 있다. 아빠는 동생이랑 같이 샀냐고 물었고, 얄밉게 내 돈 내고 내가 산거라고 답했던 날이었다. 용돈 받는 족족 자취 생활비로 소진하는 4살 어린 남동생의 사정을 알면서도. 응, 동생이랑 같이 반반 내서 샀어,라고 대답했다면 사실 아빠가 조금 더 행복했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대학생 때 동네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마감 파트였다. 근무자끼리 인수인계 노트가 있어 특이사항을 적어두곤 했다. 오픈 파트 근무자는 30대 초반의 여자였다. 사장에게 듣기론, 카페 창업을 준비 중이라고 했다. 내 교육을 그녀가 담당했고 3일간 같은 시간에 일한 후, 마감 파트에 배치되었다. 그녀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같다. 늘 노트에 번호까지 매겨가며 미비사항을 적어두었다. 출근해서 노트를 펴고, 3페이지에 달하는 굵은 글씨들을 보며 매일 모멸감을 느꼈다. 사실 나는 다른 카페에서 1년이 넘게 근무했던 경험이 있어 일이 낯설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겨진 글씨체와 문체는 지나치게 감정적이었다. '두 번 말하게 하는 것도 짜증 난다.' 같은 문구들의 나열이었다. 노트는 그녀와 나를 포함해 다른 수 명의 근무자와 사장이 공유했다. 그녀는 나와 같은 아르바이트생일 뿐 사장도, 사장의 대행도, 그 무엇도 아니었다.
한 달쯤 지났을까, 대타로 오후 파트 근무를 선 날이었다. 그녀와 교대했고, 한 달 만에 얼굴을 마주했다. 키가 비슷했던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부족한 사항이 있다면 수용하고 고치겠으나 지나치게 감정적인 표현이 불편하다고 말했다. 개인적인 감정이 있으시다면 제게 직접 말씀하시고 노트에 굳이 수고롭게 남기지 마시라고. 그러자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너 같은 애들이 사회에 나오면 정신 못 차리고 도태되는 거야. 내가 너보다 열 살은 많고 사회경험도 많은데, 충고 하나 하자면 그렇게 말 싸가지 없게 하지 마.' 나는 그 누구에게도 면전에서 그런 모욕적인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녀의 우려와 다르게 나는 아주 사회적인 인간으로 성장했다. 대학에서, 직장에서, 모든 조직에서 소속감을 만끽하고 사람을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살아왔다. 그날의 순간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았다. 상처를 받았다는 표현보다도, 무언가 무너져 내린 기분이었달까. 말로 상처를 주는 건 어쩌면 이런 거라고 체험한 날. 요즘 『내게 무해한 사람』 을 읽으며 그 날이 종종 생각난다. 제목을 입안에서 조용히 굴려본다. 여러 번 발음해본다. 무해하지는 못할지라도 그렇게까지 유해한 사람은 되지 말자고. 가끔은 상처 받고 상처 주며 살지만 사람을 주저앉히는 짓은 하지 말자고. 그 보다는 조금 더 우아하고 근사한 사람이 되어 보자고 거듭 결심하며 문장을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