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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씨, 이장님

by 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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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믿지 말고 상황을 믿으라는, <불한당>의 명대사를 아직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까닭은, 아직 제대로 뒤통수를 맞아본 적이 없어선가? 다들 의미를 아니까 명대사라 칭하는 것 같은데, 나에겐 늘 어렴풋하다. 어쩌면 ‘상황’은 수도 없이 나를 즈려밟고 갔는데 눈치를 못챘는지도.


집 지으면서 만난 고마운 이들을 떠올리며, 인복이 있나 보다 안도할 때가 있다. 하지만 그렇게 자축에 빠지는 순간 호구가 되는 게 아닐까. 호구가 되면 울리는 ‘호구 알람’ 같은 게 있으면 좋겠다. 그치만 이 큰 프로젝트에서 그 믿음직한 이들조차 없었다면 내 몸과 정신은 너덜너덜해졌을테다.


건축 허가를 위해 필요했던 토지사용승낙서 14개 중 4개를 대신 받아 준 이장님도 그런 사람 중 하나다. 우리 땅주인 아저씨는 과거의 오해들로 몇 원주민에게 미움을 받고 있었다. 그에겐 승낙서를 안 써줄거란 분도 있었다. 난 그 사이에서 어느 편도 들지 못하는, 영락없는 ‘고래 싸움에 낀 새우’ 처지였다. 땅주인 아저씨는 이장님에게 도움을 청했고, 이장님은 이웃을 찾아 승낙서를 대신 받아주었다.


승낙서 수령이 막바지에 다다르던 9월의 비바람 부는 저녁, 마을회관에서 이장님을 처음 만났다. 카톡으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그가 조씨라는걸 알게됐다. 땅을 보러 다니면서 이 동네에 창녕 조씨가 많다는 얘길 몇 번 들었다. 아랫마을에 사시는 둘째큰엄마는 창녕 조씨 무덤을 몇 번 봤다 하셨다. 나는 끝집도 짓고 뼈도 묻을 터를 찾은 건가.


“어이구, 드디어 뵙네요!”

“그러게요.”

“실례지만 어디 조씨세요?”

“창녕 조씹니다.”


반가움을 표하는 다양한 방법을 놔두고 나는 왜 악수를 청했나? 한참 어르신에게 같은 성씨라며 반갑다고 냅다 손을 잡자니. 구수한 ‘어이구’는 또 뭐람. 악수는 예상하지 못한 듯, 우산을 잡고 있다 한 박자 늦게 반응한 그와의 엇박 악수로 첫인사를 나눴다.


여느 어르신처럼 그는 나에 관해 물었다. 나는 여느때처럼 정체를 어디까지 밝힐지 고민했다. 비밀은 딱히 없지만, 되도록 조용히 살고 싶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승낙서 4개가 아직 그의 손안에 있기에, 최소한 저것들이 내 손아귀에 안착하기 전까진 무난한 서울 아가씨 정도로 남는 편이 유리해보였다. 외지인이 받을 법한 거의 모든 질문과 그에 대한 답이 오가는 동안, 창녕 조씨에 대한 편애와 수다 본능 빗장이 여러 번 풀릴뻔했지만, <불한당>의 대사를 되새기며 말을 아끼려 애썼다.


그와의 대화 속에는 묘한 공백이 몇 번 생겼다. 얼른 승낙서를 안전하게 건네받고 집에 가고 싶은 마음과, 살면서 자주 보게 될 이장님과 더 친분을 쌓아야 할 것 같은 의무감과, 더 늦으면 주차장에 자리가 없을 것에 대한 걱정과, 우리는 남이지만 어쨌든 같은 성씨로 이어진 사실 등. 여러 가지가 섞이고 충돌하며 만들어 낸 주춤거림이었다.


부족하지도 과하지도 않은 대화량이 쌓였을 무렵, 드디어 승낙서가 내 손안에 들어왔다. 승낙서를 건네며 그는 앞으로의 건축 계획에 대해 물었다. 나름 빈틈없이 설명했다 생각했는데, 그는 뭔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농지전용부담금을 면제받는 방법도 잘 알아보라고 했다. 농지전용부담금이란, 원래 농지에는 농사를 지어야 하는데, 농지를 구입해 주거/상업시설 등 다른 용도로 개발할 경우 그만큼 이 나라의 농지가 줄어든 것에 대해 농어촌공사에 내는 세금 같은 것이다. 농지를 사서 건축을 하는 사람이라면 피할 수 없는 돈이다. 절약하는 대표적인 방법은 농업인이 되는 것이다. 들어본 적은 있지만 내가 농사를 지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자세히 알아보지 않았다. 내가 멍한 표정을 지으니, 그는 저쪽에 있던 컴퓨터를 켜서는 뭔가를 잔뜩 출력해 왔다.


십수 장 정도 되는 종이 묶음은 ‘농지법’이었다. 그는 펜을 들고 제2조 ‘농지의 정의’부터 밑줄과 동그라미를 치며 읽어 내려갔다. 목적과 정의부터 읽는 사람이라니. 이 법을 가지고 일을 벌였거나, 피해를 봤거나 둘 중 하나다. 어디를 봐야 하는지 중요한 부분을 유유히 읊고, 각 조항에 연계된 시행령이 몇 페이지에 있는지 막힘없이 단숨에 도달하는 자연스러움. 일반인이 농지법을 이렇게 잘 알 이유가 뭐란 말인가?


“법조계에 계셨어요? 이 동네가 옛날에 고시촌이라 판검사가 많이 났다던데.”

“아유, 아니요.”

“근데 왜 법을 이렇게 자세히 아세요?”

“이것저것 하다 보니까요.”

“그럼 부동산하세요?”

“그보다... 옛날에 누구를 좀 혼내줘야 해서요.”


궁금증을 유발하는 대답이었지만, 그의 나이나 이장이라는 직책을 생각하면 별별 인간들을 얼마나 많이 만났을까. 더 캐묻지 않았다.


이제는 정말 마무리를 할 때. 불편한 일을 대신 해준 것에 감사를 전하며, 준비한 견과 세트를 건넸다. 참 특이한 게, 선물은 집에 가져가서 따로 먹는 게 보통인데, A4용지를 하나 펼쳐서는 거기에 견과를 종류별로 쏟는 것이었다. 그는 견과 선물은 낯설다는 듯 견과를 좋아하냐 물었고, 별로 좋아하진 않고 채식을 해서 선물로 드릴 적당한 것이 견과류라 답했다. 이런 경우 곧바로 왜 채식하냐는 질문이 돌아오는데, 의외로 “그럼 버섯 좋아하겠다”며 “근처에 버섯 농장이 많으니 이 동네에 잘 오셨다”고 하셨다.


그리 넘어가는 듯했지만 결국 그 질문이 나왔다. 왜 채식을 하느냐. 길고 긴 이야길 시작하기엔 이미 시계가 아홉 시 반을 가리켰지만, 그냥 내버려 둘 수 없는 주제가 아닌가. 여느 때처럼 국회 앞에서 개농장 구조견을 돌본 이야기부터 꺼냈다. 이야기 중간쯤되면 뭐라도 반응이 나와야하는데, 아무 반응 없이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는 그. 불안하고 수상했다.


“혹시 개농장하시는 건 아니죠?”

“안 해요.”

“그럼 개고기는…”

“안 먹어요. 나는 어릴때 집에 있던 개가 개농장 끌려가면서 눈물 흘리는 거 보고나선 안 먹어요.”


그래, 살면서 개농장하는 이장을 두 번이나 만날 리 없지. 대체로 어른들에게 채식한다 말하면, 열에 아홉은 이런저런 충고를 하신다. 그런데 그는 나의 채식에 어떤 ‘근거’가 있는지를 알고 싶은 눈치랄까. 출력한 농지법 뒷면에 메모를 하기 시작했다. 내가 어떤 단어를 말하면 그는 그에 반하거나 파생되는 단어들을 옆에 적었다. 마인드맵 그리듯. 이면지 신세가 된 농지법 뒷면은 개식용, 동물보호법, 기후위기 같은 단어들로 채워졌다. 처음 보는 동네 이장님과 동물복지 대토론을 벌이다니. 그의 반론이 대체로 과하지 않아서 재미는 있었지만, 이 주제는 여느 때처럼 끝이 없을 것이었다.


“채식한다 하면 이런저런 얘기 많이 들어요. 옛날엔 화나서 싸웠는데, 그럼 설득을 못하잖아요. 그래서 이제는 화 안내고 합리적인 수준으로 어떻게든 모든 말에 답하려 애쓰는데, 재밌는 건 제가 아무리 합리적인 얘기를 해도 듣진 않아요. 4년동안 고기 안먹었는데 저 누구보다 건강하거든요. 제 몸으로 증명하는데도 안 믿어요. 결국엔 이거에요. 걔네들 어떻게 죽는지 알고 나면 못 먹어요. 불쌍하잖아요. 이장님도 개 잡혀가서 불쌍했다는 것처럼.”


논리적인 사람은 오히려 논리로 설득할 수 없는 것 같다. 그는 납득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운동은 하는지, 어떤 운동을 하는지 물었다. 내 근력이 걱정됐나. 당시는 테니스를 막 시작한 터라 운동부심에 겨워 웨이트도, 수영도, 테니스도 한다고 떠벌렸다.


“운동은 맨몸 운동이 좋아요.”

“운동을 많이 하셨나 봐요. 체격이 뭔가 다부져 보여요.”

“옛날에 많이 했죠.”

“맨몸 운동이면 복싱 같은 거? 아, 그 혼내줄 사람 때문에?”

“복싱도 하고, 여러 가지 했죠.”


코어 힘이 약하다고 하니 그는 몸까지 일으켜서 나에게 적합한 운동 동작까지 추천해 줬다. 운동까지 배운 마당에 경계심이 무장해제된 나는 궁금했던 것을 묻고야 말았다.


“말 안해주셔도 되는데, 혼내주려던 사람 누구예요? 이쯤 되니까 너무 궁금하네.”

“하하. 있어요, 전두환이라고.”


대화 초반에 그의 원래 고향이 광주라고 했던 게 그제야 떠올랐다. 영화 <26년>이 생각났다.


일곱 시에 마을회관에 갔는데, 자정 넘어 집에 도착했다. 뜨신물로 씻으니, 잊고 있던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2021년인가? 지평에 살 때 ‘수고’하는 걸 본 적 없는 할아버지가 동네 반장이라면서 ‘수고비’를 받으러 왔던 일. 허락도 없이 마당을 거쳐 현관 앞까지 와 있기에 마당 밖으로 쫓아냈었다.


난 수십년을 평온함 속에 살다가 동물권에 관심을 가지면서, 시골에 살면서 전례 없던 비상식을 참 많이 만났던 것 같다. 그와중에 발견한 나의 장점은 ‘적응력’이다. 미친놈이 지랄하면 미친년이 되어 지랄지랄을하는 식으로, 비상식에 더 비상식으로 대응할 줄 알았다. 그 과정에서 사람과 세상을 불신하는 습관도 생긴 것 같다. 별일 아닐 수도 있는데, 불신이 오래되면 사람이 피폐해진다.


창녕 조씨보단 상황을 믿는 인간이 될거지만, 전보단 상식적인 시골생활이 펼쳐질 것 같다. 적어도 미친년이 될 필요는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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