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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영 Sep 01. 2024

청경채 파스타가 나를 살렸다

나를 치료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녹색이다

얼마 전 태어나 처음으로 ‘정신과 병원’을 검색해 봤다. 평생 자부하기를 나의 미덕은 단연 자정 능력이었다. 지구가 80억 명의 조문영으로 이루어졌다면 그 세상은 적어도 우울증/자살/폭행/살인/동물 대학살은 없는 안전한 세상일 거라 믿어왔다.


2년 전 폭우로 지평 시골집 누수가 심해지고, 마을 밖으로 나가는 작은 교량마저 반쯤 무너졌다. 교량이 완전히 무너져 고립되기 전에 나는 개들과 아이맥만 차에 싣고 서울 본가로 피신했다. 세 들어 살 시골집을 다시 금방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나는 멀쩡한 집에 살고 싶은데 멀쩡한 집의 주인들은 개가 두 마리인 세입자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리해서 집을 짓는 데까지 생각이 닿은 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갈 데가 없을 때 살 수 있는 본가가 있는 게 다행이지만, 경험 상 엄마와 나는 절대 같이 살아선 안 되는, 거리를 두어야 평화로운 관계다. 뭐 이런 배부른 패륜아가 있나 싶겠지만 그럴 만한 가정사가 있다. 게다가 십수 년 만에 다시 함께 살게 된 그녀에게는 동거인을 지옥으로 빠뜨리는 다양한 일상의 재주가 있었다.


그녀는 외출 후에 바로 손을 닦는 법이 없었다. <더 글로리>의 중요한 대사는 “집에 오면 뭐부터 한다?”는 하도영의 물음과 “손 씻기!”라는 하예솔의 대답이다. 우리 개들도 지키는 그 기본을 지키지 않고 그녀는 씻지 않은 손으로 개들을 만졌다. 변기물을 내릴 때 뚜껑을 닫지 않았다. 두루마리 휴지를 늘 반대 방향으로 꼽아 놓았고 치약은 위부터 짰다. 내가 아침마다 빵을 구워 먹는 팬에 소고기와 생선을 굽고, 그마저도 쇠숟가락으로 음식을 뒤집기 일쑤라 새 프라이팬을 구입해야 했다. 선물 받아 아끼는 그릇은 생뚱맞게 세탁실에서 물 받침대가 되어 있고, 과일이나 채소를 담는 반찬통에 김치나 마늘 반찬을 넣어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만들었다. 요리를 하는 사람들은 공감할 고통.


냉동실엔 정체불명의 음식들이 일 년 넘게 자리만 차지했고, 먹지도 않을 반찬을 자꾸 만들어 냉장고엔 자리가 모자랐다. 예상대로 그것들은 얼마 뒤 음식물 쓰레기 신세가 됐다. 물로만 헹궈도 되는 간단한 설거지를 며칠 동안 방치하고, 일회용품을 흥청망청 썼다. 등산을 다녀오면 온몸에 바른 멘소래담 냄새에 코와 눈이 매웠다. 나도 기침이 나올 정도인데 후각이 예민한 개들은 어땠겠나.


불필요한 물건들을 버리지 않아 집은 늘 물건으로 가득한데, 근본 원인인 맥시멀리즘이 치료되지 못하니 이 크지도 않은 집은 금방 더러워졌다. 그녀는 크지도 않은 이 집을 스스로 청소하지 못해 청소하는 분을 몇 년째 고용해 왔다. 그분이 오는 날이면 난 평소보다 더 힘들었다. 내 작업 테이블에서 쓰레기가 아닌 것을 버리거나, 물건을 예상외의 장소에 갖다 놓았다. 수십 번의 부탁에도 같은 일이 벌어졌고 불안함을 견디다 못해, 이제는 청소날 집을 나설 때마다 내 방문과 옷장을 테이프로 봉인하고 청소 금지 경고문을 부착하게 이르렀다.


갈등 초반엔 고성과 육두문자가 오갔다. 모녀 둘 다 여간 지랄 맞은 게 아니라서. 삐삐삐 도어록 소리에 치토는 내 품으로 달려와 안겼다. 도어록 소리가 싸움의 시작이라는 걸 금방 알아차린 것이다. 미안했다. 적어도 소리는 지르지 말아야 했다. 그녀와 같이 머무는 시간을 최대한 줄이는 게 유일한 해법인데, 개들 밥을 챙겨야 하니 그마저도 어려웠고 계피가 아픈 시기엔 집을 비울 수조차 없었다. 이럴 땐 눈을 감는 것 외엔 방도가 없다. 잠을 자는 것이다. 그러니 생활 리듬이 깨지고, 몸이 점점 자주 아팠다.


어쩌면 지극히 보통 사람이고, 어쩌면 지극히 보통의 집일 지도 모른다. 중년 여성이라고 꼭 살림을 잘하란 법은 없다. 집 밖에서는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사람이라는 게 아이러니할 뿐. 그녀는 외계인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좀 편했다. 중요한 교훈도 얻었다. 난 결혼이나 동거는 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일상의 톱니가 완벽하게 잘 맞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 예민한 성격으로 사람을 통제하려들 것이 뻔했다.


2년을 그렇게 살았다. 아니 견뎠다. 가끔 웃기도 했으니 다행이다. 벗어날 구멍이 없으니 더 예민해져 시한폭탄 같았는데, 혹여라도 범죄를 저질러 철창신세가 되면 우리 개들 돌봐줄 사람도 없고 애써 지은 집에 살지도 못하니 그것만은 안 된다며 마음을 붙들었다. 이제 준공 신청이 가시화될 무렵이라 ‘조금만 더 참으면 돼’라고 스스로를 안심시킬 수도 있었다.



그러다 문제가 터졌다.


한 달 동안 사람을 희망고문하던 창호가 드디어 도착했다. 한편에 쌓여 있는 창호를 주말에 보고는 의아했다. ‘생각보다 많이 하얗네? 저녁이라 어두워서 그런가? 필름 벗기면 주문한 색상이 나오나?’ 생각했다. 그런데 월요일 오후에 설치된 창호를 다시 보니, 보호 필름은 원래 없었고 발주한 컬러와 전혀 다른 오프 화이트 색상인 것이다. 그때까지도 ‘흰색을 설치한 뒤에 발주한 컬러로 도장을 하는 건가?’ 생각했을 정도다. 아찔하다. 하루라도 늦게 발견했다면, 다음날 단열재도 마저 붙이고 외벽 마감을 했을 텐데. 모조리 뜯고 다시 작업하느라 더 오랜 시간이 걸렸을 테고, 뜯으면서 생길 집의 하자는 결국 내 몫이 아닌가.


창호를 다시 제작하는 데 3주가 더 걸린다고 했다. 이런 썅. 겨우 3주만 기다리면 될 문제였지만 ‘겨우 3주’가 아니었다. 이 괴로운 생활을 그만큼 더 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그래도 나보단 수천 만원의 손해를 보게 된 창호 업체가 더 불쌍해 나의 3주는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집에 와 창호 설치가 늦어지며 생길 여러 문제들이 떠올랐다. 오랜만에 악몽을 꾸었다. 새벽에 깼다가 다시 힘들게 잠들었는데, 잠시 후 화장실의 개똥을 치우라며 새벽 4시에 그녀가 나를 깨웠다. 모세 혈관 몇 개가 빡 소리를 내며 터지는 느낌이었다. 내 몸을 몇 번 세게 때리지 않고는 참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 우두커니 앉아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고서야 겨우 마음을 진정시켰고, 해가 밝아오자 나는 정신과 상담을 검색하는 신세가 되었다. 


내 생일날 아침의 일이다. 나를 힘들게 한 건 당장 벗어날 수 없는 물리적 현실보다, 내가 스스로를 돌볼 능력을 상실했다는 사실이었다. 개들에게 이런 형편없는 보호자가 되어서는 안 되는데.


집 짓기에 ‘늙음 모먼트’가 있다면 이런 순간이다. 누군가의 실수로 인해 잘못 없는 건축주가 재산적, 시간적, 정신적 손해를 봐야 할 때. 더군다나 나처럼 빠듯한 재정 상태에서 먹고 싶은 것, 사고 싶은 것을 아껴가며 현장에 간식까지 부지런히 사 들고 갔던 건축주에게 이런 순간은 더 큰 배신감과 환멸감을 안겨준다. 그러나 반대로 집을 지으면서 더 이상 하지 않는 말이 있다. 꼭 현장에서 뿐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전에 말했는데 잊으셨어요?” “왜 그러셨어요?” 라며 과거를 탓하는 말. 사람이 하는 일이기 때문에. 여러 사람이 함께하는 일이기 때문에. 실수가 없으면 이상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누구에게도 악의가 없으며, 대부분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점이다. 순간의 욱함으로 인해 인의를 저버리고 이토록 긴 시간 잘 다져온 장기 프로젝트를 물거품으로 만들 수는 없다.


이 악의 기운은 나를 아주 세게 흔들었지만, 금방 스쳐 지나가기도 했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은 언제나 옳다. 그리고 회복의 시간은 나이 듦에 따라 점점 단축된다. 바쁘게 일하고, 전보다 책임이 커졌기 때문일 것이다. 작업한 시안이 괜찮고 클라이언트가 맘에 들어하면 나는 또 기분이 좋아서 살아갈 에너지를 얻었다. 무엇보다 언제든 만질 수 있는 계피와 치토의 따뜻한 배때기, 언제든 콧구멍 깊이 들이킬 수 있는 꼬순내가 있었다.



자정 능력을 회복했다는 기분을 감지한 건, 오랜만에 파스타 한 그릇을 요리했을 때였다. 가장 좋아하는 면 굵기인 스파게티니를 익히고, 냉장고를 뒤져 다양한 재료를 꺼내 다듬고, 마지막에 트러플 오일을 왕창 쏟아부어 내 입맛대로 파스타를 만들었다. 내 몸속으로 들어갈 초록색 청경채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한결 나았다. 나를 치료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녹색이다. 또 한 가지 사실에 안도했다. 내 고통을 잊고자 차린 이 한 그릇에 그 어떤 동물도 희생되지 않았다는 점. 내 번뇌를 잊자고 남의 살덩이를 칼로 도려내지 않아도 되는, 나는 채식인이었다.


그리 커다란 집은 아니지만 점점 예산도 늘어가고 으리으리해져 가는 집을 보며 늘 염치가 가려웠다. ‘내가 이런 크고 좋은 집에 살 자격이 있나? 정말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많이 하면서 살아야겠다. 불쌍한 동물들 많이 도우며 살아야겠다.’ 그래야 고개 정도는 들고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이제 자격은 둘째 치고, 이 집은 나의 유일한 피난처(shelter)다. 10년 까지는 아니지만 5년은 늙었다. 그러나 5년을 허투루 허비했다고는 볼 수 없다. 성숙은 거창하고, 숙성 정도는 되었으니까. 그리고 이 집에 살면서 잃어버린 5년은 금방 돌려받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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