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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래 Apr 15. 2024

봄날은 간다

우리 마을을 닮은 남프랑스 시골 마을



꽃샘추위가 물러갔지만 아직은 쌀쌀하던 3월, 부지런한 농부는 작년에 쓴 땅을 갈아엎고 모판을 옮겨 심었다. 보드라운 솜털이 막 자란 갓난쟁이의 머리털처럼 모종은 삐죽 나와 바람결에 따라 살랑였고 아침저녁으로 농부들이 애지중지 논밭을 돌보는 풍경을 목격할 수 있다. 

‘허수아비인가?’

유심히 살펴보면 한 자리에서 못 박힌 듯 서서 작업하는 성실한 농부임을 알 수 있다. 자두나무와 복숭아나무도 저마다 흰 꽃과 분홍빛 꽃을 활짝 피웠으니 이제 진정한 봄이 찾아왔다고 할 수 있겠다.     


봄철 시골길에는 차보다 경운기가 더 많이 다닌다. 좁은 2차선 산길에서 경운기나 트랙터를 앞에 두고 달리게 된다면 꼼짝없이 지각이다. 눈치를 보다가 앞이 보이는 직선 도로에서 재빨리 깜빡이를 켜고 앞질러야 한다. 천지개벽인가 싶을 정도로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터덜터덜 걸어가는 경운기는 멋진 자태를 뽐내며 뒤쳐진다. 풍경에 취해 늑장을 부린 탓에 제시간에 도착할 수 있을지 간당간당하다지만, 저 앞에 시골 마을 정자에 앉아 봄을 만끽하고 싶다는 욕심이 슬그머니 고개를 든다. 

‘나도 한량처럼 저기 앉아 곧 사라질 봄을 만끽하고 싶구나.’     


어쩌다 보니 시골에 살고 있는데 어쩌면 나는 날 때부터 시골 체질이었을 게 틀림없다는 확신이 든다. 단순히 평화롭다는 감상으로는 부족한 목가적인 시골 풍경을 매일 볼 수 있다는 행운을 손에 꽉 쥐고 있는 덕분에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심장이 콩닥콩닥 뛴다. 어서 일어나 커피를 내리고 거실 창문을 활짝 열어 새로운 날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견딜 수가 없다.     


두 달 전에 새롭게 이사 온 동네는 몇 해 전에 가봤던 남프랑스의 어느 마을을 닮았다. 니스에서 시작한 여름휴가는 아비뇽을 거쳐 남부의 여러 작은 마을로 향했고 고르드(Gordes)를 제외하면 이름조차 떠오르지 않는 작은 시골 마을을 서너 곳 방문했었다. 깊숙이 자리 잡은 우리 마을보다 훨씬 더 가파른 산골에 숨어 있던 남프랑스 시골 마을은 찾아가는 길부터 험난했다. 구불구불 뱀이 기어가듯 10인승 승합차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다국적 참가자들은 뱃속에서 요동치는 기운을 애써 참아내느라 말을 아끼는 것처럼 입을 꾹 닫고 있었다.      


마을에 도착하고 나면 간단한 설명을 듣고 자유롭게 흩어져 시간을 보냈다. 종종 이동하는 차 안에서 가이드는 마이크에 대고 가고 있는 마을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대부분 정보는 유익하고 재미있었다. 가이드는 아주 능숙한 사람이었다. 유럽인들 사이에서 유명했던 첫 번째 마을 고르드(Gordes)에는 제법 관광객이 많았다. 적당한 관광객 수는 활기를 가져온다. 여름이지만 우리나라 봄철 같은 햇살과 기온 덕분에 발걸음은 가벼웠고 나와 같이 들뜬 관광객들이 낯선 이에게 기꺼이 미소를 지어주었고 양보라는 친절을 베풀었다. 고르드 마을은 웅장한 황금빛 단층이 아주 인상 깊은 산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안 그래도 높은데 마을에서 가장 높은 지점에 서서 자연을 바라보고 있으면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도 내 주변은 진공상태인 것처럼 고요해졌다. 불현듯 허기졌다.     



커다란 파니니를 반으로 갈라서 햄과 루꼴라 따위로 속을 채운 샌드위치와 남프랑스의 명물 라벤더 아이스크림을 사서 근처 주변을 두리번 리다가 자유분방한 유럽의 관광객들을 따라 길바닥보다 살짝 높은 연석에 걸터앉아 속을 채웠다. 놀라울 정도로 훌륭한 맛은 아니었지만 그런대로 먹을만했고 다 먹을 수 있을까 우려스러웠던 샌드위치는 금세 사라졌다. 욕심부린 라벤더 아이스크림이 녹고 있었기에 가능한 빠르게 한 손을 비워야 했다. 라벤더 아이스크림은 예상대로 특이했다. 연보랏빛 소프트콘은 생각보다 덜 달았고 진한 라벤더 향을 지니고 있었다. 이미 다 져버린 남프랑스의 라벤더 꽃밭의 아쉬움을 그런대로 채워주었다. 물론 다시는 사 먹지 않을 맛이었다.
 


첫 번째 마을을 제외하곤 모두 인적이 드물었다. 자연 속에 폭 파묻힌 아기자기한 마을로 마을 주민들이 모두 일하러 나간 걸까 골목도 광장도 모두 고요했고 마치 영화 속 세트장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지막에 들린 마을에는 유독 사람이 적었다. 마을 주민들은 다 일하러 나갔으려나? 마을 중앙에 계단이 있었고 계단을 하나씩 오를수록 숨어 있던 집들이 나왔다. 구석구석 퍼진 골목으로 숨어들어도 언덕을 향해 오르다 보면 어느덧 마을에서 가장 높은 전망대에 도착했다.

“사진 찍어줄까?”

구불구불 승합차 여행 동지인 한 커플이 먼저 전망대에 올라있었고 늘상 혼자 돌아다니는 내가 가여워 보였는지 선뜻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제안했다.

전망대 난간에 올라 여러 포즈를 취했다.

“사진이 아주 잘 나왔어.”

카메라에 담긴 건 오로지 나였다. 문자 그대로 풍경이 아닌 나만 담겨 있었다. 친절에 더한 요구를 할 순 없으니 ‘고맙다’는 인사로 대신하곤 커플이 내려가기를 기다렸다가 삼각대를 세워 다시 사진을 찍었다. 남프랑스 시골마을을 여행하면서 찍은 수천 장의 사진이 노트북에 저장되어 있지만 아무래도 그때의 감정을 되살릴 정도로 현실적인 풍경을 담고 있진 못하다. 그럴 땐 창문을 열고 바깥 현실을 본다. 


‘아름답다는 말로 부족해.’

이럴 때면 부족한 어휘 실력이 안타깝다. 그러니까 나는 전 세계 어디서나 내게 커다란 감동을 안겨주는 시골을 찬양하고 있는 중이며 그중에서도 현재 내가 살고 있는 이곳, 그리고 이곳을 닮은 지난 남프랑스 여행의 기억을 꺼내보았다.     



바로 어제는 길 양쪽에 벚꽃 나무가 빽빽이 서 있는 집 앞 도로를 지나가다가 세찬 꽃비를 맞았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속 터널을 지나가듯 아름다운 벚꽃잎들이 매섭게 차 유리창을 덮쳤고 나는 홀린 듯 차를 세웠다. 어차피 차가 잘 다니지도 않는 도로다. 마침 맞은편에도 홀렸는지 차를 세워놓고 구경하는 중이었다. 창문을 열고 손을 내밀었다. 꽃잎 한 장이 저절로 손바닥에 와 붙었다. 

'오늘의 행운이다.'



내 마음은 아직 봄인데 오늘은 세찬 봄비가 쏟아진다. 벚꽃나무에 달려있던 꽃잎이 빗방울과 함께 우수수 떨어지겠지. 아쉽지만 빗물을 점령해 버린 분홍빛 꽃잎을 보며 이만 봄을 보내야겠다. 어쩐지 허기진다. 어쩐지 피곤하면 더 허기진다. 정신적 피로감이 밀려오면 나도 모르는 새에 초콜릿을 입안에 밀어 넣고 있는데 몽롱한 눈을 들어 보면 옆자리에 과자 껍데기가 수북하게 쌓여 있어 소스라치게 놀란다. 나는 과연 진짜 허기진 걸까, 여기서 순수한 허기는 얼마나 될까? 지나가는 봄 앞에서 왠지 모를 허기가 느껴진다. 헤밍웨이는 ‘비록 덧없는 봄이라도 일단 오기만 하면 어디서 그 행복을 가장 잘 누릴 것이냐는 것이 유일한 관심사’라고 했다.

      

“허기에도 여러 종류가 있잖아요. 그리고 봄에는 더 허기가 지죠. 하지만, 이제 봄은 갔어요. 기억도 일종의 허기라고 할 수 있겠죠”     


내가 느낀 허기는 순수한 허기보다 이미 사라진, 지금 지나가고 있는 봄을 향한 그리움이었을까. 지난 여행에 대한 노스탤지어였을까. 봄은 겨울과 여름이라는 거대주주 사이에 낀 찰나와 같지만 짧기에 더 알차게 누리고 싶은 마음은 가장 강렬하다. 아마 한철의 기억은 세 계절 내내 허기로 남아 나를 괴롭히겠지만 어제 내 손에 잡힌 행운처럼 단단히 쥔 그리운 기억이 될 것이다. 그리고 '덧없는 봄'이 다시 오면 기억을 되살려 가장 열심히 '그 행복을 누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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