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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래 Apr 01. 2024

이방인

도하의 #999



도하에 살던 시절, 나는 휴일만 기다렸다. 어쩌다 이삼일 연속 쉬는 날이 붙어서 스케줄이 나오면 입꼬리가 씰룩씰룩 올라갔고 어서 그날이 오기만을, 그날만큼은 맑은 하늘이 맞아주기를 바랐다. 365일 숨 막히는 더위가 이어질 것 같은 중동 국가에도 봄은 온다. 살랑이는 바람이 옷깃을 스치고 온통 누런색이던 하늘에도 흰구름이 존재감을 드러내면서 저녁에는 아름다운 석양에 물든다. 꽃화단 하나 없는 황량한 길거리지만 마치 새싹이 돋아난 것처럼 코끝에 싱그러운 냄새가 감돌기까지 한다. 


나는 해가 바뀌자마자 카타르에 도착했다. 날이 좋아지기 시작하던 무렵이었다. 아직 가본 적 없는 미지의 나라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막막한 심정에 내 생활을 구축하고자 이런저런 생활 시설을 찾아봤고 온라인 사전 답사도 마친 참이었다. 이방인이라면 시원한 밤바람이 불어오면 오래된 시장에서 천막과 가판대를 펼쳐놓고 휘황찬란한 잡화를 판매하는 수크(시장)를 상상하겠지만 도하는 세상에서 가장 럭셔리한 카페와 음식점이 많이 모여 있는 도시중 한 곳이다.


도하는 내게 홈 스위트 홈, 집이었다. 생소한 나라에 적응하지 못하고 울타리 밖을 배회한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도하에서 위안을 얻고 안정을 추구하고 있었다. 세계 어느 도시를 가도 찰나의 흥분과 재미를 충족하고 호기심을 해결하면 어김없이 불안과 피로가 찾아왔고 도하 내 방에 도착해서야 비로소 나는 두발을 쭉 피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연달아 휴무가 붙어 있는 날이면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샤워를 하고 대충 남은 채소와 과일을 넣고 아침을 해결한 후 어김없이 책과 노트북을 챙겨 알비다 공원으로 향했다. 

그곳에 카페 #999이 있다.



알비다 공원을 마주 보는 자리에 카페 #999이 있다. 뒤쪽으로는 과거 소방서/민방위청이었던 건물이 상주 예술가 프로그램을 위한 미술관으로 용도를 바꿔 활발하게 운영 중인데 건물 외관 자체가 독특해 시선을 한눈에 사로잡았고 외벽엔 힙한 그래피티까지 그려져 있었다. 


아이들은 겅중겅중 망아지처럼 뛰어다니고 돌바닥에서 분수가 뿜어져 나온다. 

군데군데 울창한 나무가 공원이란 이름을 부끄럽지 않게 지켜준다. 

푸릇푸릇 나무아래 아바야를 입은 소녀들이 나무 아래 돗자리를 펴고 앉아 캔버스에 유화를 그리고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와 어우러져 명화 같은 분위를 자아낸다.


카페 #999에서 내가 주문하는 메뉴는 늘 정해져 있다. 따뜻한 아메리카노와 피스타치오 케이크. 평일 식사 시간대를 피해서 가면 카페는 늘 한가로웠다. 햇빛과 모래가 풍요로운 나라답게 사방으로 고운 새하얀 빛이 쏟아져 들어왔고 저 멀리 빛을 받아 반짝이는 멸치 떼처럼 보이는 알비다 공원의 나뭇잎이 녹음을 전해왔다. 

'어쩌면 뫼르소가 이런 태양빛에 정신을 빼앗겼는지도 모르겠어.'



새하얀 탁자에 진한 아메리카노와 고소하고 풍미 넘치는 케이크가 올라오면 언제 태양에 정신을 빼앗겼냐는 듯 포크를 바쁘게 움직인다. 도하에서 처음 해 본 것들이 꽤 많은데 그중 최고는 단연 피스타치오 케이크를 태어나서 처음 먹어본 것이다. 부드럽고 고소한 풍미가 입안 가득 훑고 목구멍을 넘어가면 그제야 자리를 고쳐 앉고 어딘가에서 사 온 책을 펼쳐 천천히 읽는다. 내게 소중한 게 책 속 문장인지 피스타치오 케이크가 넘어가는 순간인지 아니면 집이라 느끼는 도시에서 느끼는 안온한 시간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999에서 나는 완전한 위안과 평온을 얻는다. 책을 읽다가 뒷 이야기를 아껴서 읽고 싶을 땐 노트북을 꺼내 여행기를 적곤 했다. 몸은 모래의 나라에 편안하게 앉아 있지만 정신만은 다시 그 장소로 날아가 발바닥이 붓도록 여행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곤 했다. 누구도 나를 방해하지 않고 내 세계를 여행하게 된다. 세계 어느 나라의 맛있고 멋있는 카페를 가더라도 이곳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한 번은 신이 나서 우버를 타고 20분을 달려 #999으로 갔는데 이상하게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었다. 1권을 사면 다른 한 권을 반 값에 살 수 있다는 프로모션에 혹해 더블린 서점에서 책을 무더기로 사 온 직후였고 반권도 다 못 읽을 걸 알면서 책을 2권이나 챙겨 온 참이었다. 의아한 표정으로 텅 빈 카페의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는 나를 오히려 이상하게 바라보던 직원은 내가 외국인임을 알아차리곤 친절하게 읊어줬다. 

"라마단 주간이에요."

아차, 라마단이구나. 

방금 전 이프타르 식사를 서빙하고 왔으면서 내게는 적용되지 않는 규칙이라 생각했다. 라마단은 이슬람 문화권을 주요 의식이자 행사로 모든 식당이 축소 운영을 하거나 배달 영업만 한다.

'아까운 택시비만 버렸네.'

카페에서 파는 모든 메뉴를 포장해 갈 수 있었지만 굳이 그러고 싶지 않았다. 쓸쓸하게 집으로 돌아와 마트에서 산 싸구려 머핀에 땅콩잼을 발라 먹으며 창밖으로 보이는 라마단 주간의 하늘을 바라봤다.



나는 소매단에 튀어나온 실밥 같은 존재일까

섞인 듯 동화되지 못하는 나는 이질감에서 자유로워졌다. 직사광선으로 내리쬐는 태양을 잠시 참아내면 공원 반대쪽에 유적지처럼 서 있는 사원을 만날 수 있는데 용도는 모르겠지만 오가는 이가 없는 시간대에 새하얀 사원을 걸으며 '사라져 버린 옛 왕궁의 후손'이라는 콘셉트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공원을 누볐다.


한국을 떠난 나는 어디서나 이방인이었지만 #999에서 익숙한 커피 향을 맡으며 잔뜩 뭉친 긴장을 풀고, 피스타치오 케이크로 얼얼한 마음을 달랬다. 마치 하나의 의식으로 굳어져 어디를 다녀오든 전리품을 자랑하는 장수처럼 알비다 공원을 산책하다가 커피를 마시고 케이크를 먹으며 아늑하고 익숙한 집의 냄새를 맡았다. 

'이곳이 있어서 다행이야.'


진작에 도하를 떠나 진짜 내 집으로 돌아왔지만 진하고 강렬한 커피가, 커튼을 통과한 부드러운 햇살이 때때로 내 입안에 사르르 풍미 가득 피스타치오 케이크를 재현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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