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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래 Sep 23. 2024

시골길 드라이브

내 작은 감각

   


어제 오후에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책이 재미없어 덮어버린 것이다. 오랜만에 여유로운 독서에 빠져들고 싶어 제대로 자리를 잡고 책을 펼쳤는데 지루하기만 했다. 나름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운전하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뜻을 이해할 수 없어 재미가 없었던 게 아닐까 싶었다. 한글인데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니 무슨 말인가 싶겠지만 한 번쯤 경험해 보지 않았던가. 문장을 따라 눈동자는 좌우로 움직이지만, 시신경을 타고 들어간 텍스트들은 뇌의 어느 기관도 건드리지 못하고 증발하는 현상.     


나는 글을 해석하지 못하게 될까 두렵다. 단어의 아름다운 뜻과 작가가 숨겨놓은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게 된다면? 끔찍하다. 글을 쓰지 못하게 될까 무섭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쭉 책 읽는 행위를 습관처럼 반복하며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잃게 되는 상황은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다.   

  

그래, 휴식이 필요했다. 이 계절에 창문을 활짝 열고 달리면 코끝이 시큰해진다. 저절로 콧등을 찡긋하게 만드는 거름 냄새 탓이다. 딱히 이 냄새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야생의 구수한 냄새 폴폴 풍기는 시골길이 좋다. 부러 창문을 활짝 열고 천천히 운전한다. 어린 시절 아빠 차를 타고 시골길을 달릴 때면 소들이 음머 – 음머 - 거리는 외양간을 지나치곤 했는데 동생과 코를 움켜쥐고 냄새난다고 난리 치던 그때 생각이 나면서 천천히 달리는 시골길이 더욱 즐거워진다.      


서쪽을 향해 사그라드는 강렬한 태양을 마주하며 달리면 산등성이로 피어오르는 주황빛 아지랑이를 볼 수 있다. 아름다움에 넋을 놓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해 질 녘의 아름다움은 불안감을 동반한 모순덩어리이다. 불현듯 읽지 못한 텍스트들이 떠오르며 마음이 일렁인다.

‘세상은 눈부시게 빛이 나지만 내 하루는 문단 하나 읽지 못하고 지나가 버리는구나.’

     

“논산이 떠올라.”

“응? 갑자기?”     


갑작스러운 변주에 심란한 마음이 저물어 버렸다. 짝꿍이 10년이 다 되어 가는 옛 기억을 끄집어냈다. 

“이 냄새 말이야. 논산 훈련소 주변에 아무것도 없거든. 시골이라서 이런 구리구리한 냄새가 나는데 희미하게 갓 벤 풀 냄새가 섞여 있어. 게다가 훈련할 때 말이야. 그때도 시골길을 걸으니까. 그래서 그때 생각이 나네.”  


창문을 활짝 열고 손을 내밀어 눅진한 공기에 묻어나는 신선한 공기를 쥐어본다. 냄새로 저장된 기억의 힘은 강력하다. 누군가 잊고 있던 아주 오래된 기억을 꺼내 감각을 되살리고 추억을 타인과 공유할 수 있도록 역할을 한다. 10여 년 전 논산이라니, 경험해 본 적 없지만 어쩐지 알 것만 같았다. 나도 신이 나 어린 시절 아빠차 뒷좌석에 앉아 동생과 장난치고 말다툼하던 일화를 꺼냈다.     


“인간의 후각은 참 대단해, 그렇지?”

“그러게. 나중에 또 이런 냄새를 맡게 되면 우린 이 순간을 떠올리겠지?”      


냄새를 인지하고 분석하고 기억하는 과정에 상당한 집중력이 필요하다. 시간과 돈에 치여 살아가는 바쁘고 고달픈 현대인들이 미세한 냄새를 일일이 인지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토록 기다리던 봄철 길가에 핀 꽃향기도 모르고 넘어가는 일이 다반사니 코를 움켜쥘 정도로 기분 나쁜 악취를 제외하고 냄새에 관심을 기울일 일이 뭐가 있을까. 시각에 지나칠 정도로 의존하는 요즘 사람들에게 후각을 비롯한 인간의 오감을 의식적으로 사용할 의무 시간이 책정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고 보니 요즘 내가 그랬다. 일할 땐 노트북, 쉴 땐 핸드폰, 잠들기 직전까지 조그마한 화면에 시선을 고정하고 스르륵 잠이 들었다. 주변을 관찰하고 고이 접어 보관할 여유를 내지 못했는데 그래서 책이 지루했던 모양이다. 온 감각이 기능을 잃고 전의를 상실한 것이다. 때로 드라이브에 나서는 여유 정도는 필요하다. 특히 말과 생각의 볼륨을 줄이고 (생각에도 음소거 기능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 주변에 존재하는 눈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것들에게 주의를 기울여 볼 필요가 있다. 

                

차 안은 말소리 하나 없이 고요했지만 충만했다. 모습을 거의 감춘 태양의 마지막 오렌지 빛깔 흔적, 비료 냄새와 수분을 머금은 건초 냄새, 잔잔한 바람 소리와 신선한 공기까지 우리의 저녁 드라이브를 기억할 감각으로 가득했다. 특히 냄새로 과거의 기억을 소환해 서로의 경험을 나누던 순간을 오래도록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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