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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흔적 Nov 29. 2019

지극히 보통의 감수성




당신은 평범한 사람인가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다고 대답할지 모르는 이 질문은 사실 매우 애매모호하다. 평범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평균을 의미하는 걸까.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의 삶을 합쳐 n분의 1로 나눈다고 해서 그것이 '평균'을 나타내 주는 지표가 되지는 않을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균이 된다는 것은 남들의 시선과 더불어 무언가 그 이상은 해야 할 것 같은 무언의 압박을 가져다준다. 그리고 내가 그 평균에 얼마나 부합한가를 따져본다면 어떨까. 어떤 건 평균을 넘는 것도 있을 테지만 대부분 한참 못 미치는 것들이 수두룩하겠지.


지극히 평범하고 보통의 삶을 산다는 건 어떤 걸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테두리 안으로 들어올 수 있을까. 그것은 좋은 것일까. 나쁜 것일까. 아니면 특별한 것일까.


미루고 미루다 뒤늦게 본 영화 '82년생 김지영'을 극장에서 보고 나는 예상치 못하게 초반부터 눈물이 터지고 말았는데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 멈추지 않아 당황스러웠다. 휴지 한 장 준비하지 못했기에 대략 난감이었다. 퉁퉁 부은 소시지 눈을 하고 나오면서 생각했다. 나는 왜 그렇게 눈물을 흘렸던 것일까.


나는 김지영이 아니다. 김지영을 움츠러들게 만들었던 존재들이 내겐 존재하지 않았다. 매사에 아들을 운운하는 아버지와 친척들, 며느리를 일꾼 삼는 시댁, 가족들 앞에서 제대로 할 말도 못 하고 회피하는 남편 등등. 이들은 어디에나 있는 것 같지만, 그것이 꼭 반드시는 아니다. 누구도 타인과 똑같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같은 부모 밑에서 자라나도 타고난 기질이나 상황, 기회와 선택에 따라 점점 더 다른 삶의 모습을 갖게 된다. 김지영에게도 같은 가정환경에서 자라나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는 언니가 있다. 그녀의 이야기가 완벽하게 평균이라고 볼 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에 절절하게 공감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김지영이 나와 데칼코마니처럼 똑같은 에피소드를 겪었기 때문이 아니다. 다만, 현실의 암담함이나 내가 어찌할 도리를 모르겠는 답답함, 곱씹을수록 치밀어 오르는 화 같은 감정들에 대한 경험치가 내 안에도 존재한다. 가부장제가 나를 엄습하려던 위기의 순간들과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았던 친구의 이야기가 감정의 저장소 어느 한 켠에 틀어박혀있다. 왜 그래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면서 순응하고 또 혼란스러워하기도 하면서 많은 시간들을 보내왔다. 영화가 보여주는 현실적인 장면들은 그렇게 구겨져있던 내 기억의 한 구석을 자꾸만 건드렸다. 


무언가에 혹은 누군가에게 공감한다는 건 어떤 감정일까? 단순한 동정이나 연민의 시선이 아니다. 그저 허구의 이야기를 바라보는 판타지도 아니다. 누군가는 격렬하게 느끼지만, 누군가에겐 살면서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을 만큼 무감각한 것일지도 모르는 그것. 어떤 경험과 생각을 하며 살아왔느냐에 따라 달라지고, 너무나도 큰 간극을 보일 수밖에 없는 그것.


감수성은 사회에 대한 것에서부터 지극히 개인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고도 복잡하며 무 자르듯 이야기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것들이 얽혀서 만들어진다. 특권에 익숙한 사람들은 여태껏 문제가 되지 않았던 이야기들을 쏟아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쓸데없는 논쟁이라 여기고 때로는 역차별이라고 느낀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바라보는 세상이 주는 기회와 가능성은 서로 다른 색을 지닌다. 50년대에 태어난 엄마와 80년대에 태어난 내가 생각하는 삶의 기준도 역시 너무나 다르다. 여행의 묘미를 느껴보지 않은 사람들은 여행이 주는 자유로움과 그 특유의 감수성을 알지 못한다. 쓸데없는 돈 낭비라고 느낄지도 모른다. 


어떤 것에 대해 반응하는 태도와 표정, 그것으로 인해 표현해내는 말과 글에서 각자의 감수성이 묻어난다. 그리고 지금 많은 영화나 책에서 쏟아져 나오는 서로 다른 개인의 이야기들은 그 보통의 감수성에 대해 목놓아 외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벌새'는 내게 약간 의아한 영화였다. 도대체 이 영화는 어떤 기승전결로 흘러가는가. 이 영화가 던지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일까. 와 같은 의구심을 품고 처음부터 눈에 레이저를 켜고 지켜봤지만, 모든 에피소드들은 별 것 같으면서도 별 것 아닌 것처럼 그냥 그렇게 물 흐르듯 흘러가버렸다. 그리고 그렇게 끝이 나버렸다. 뭐지. 뭐라고 표현해야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이해력 부족인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가만히 영화의 장면들을 떠올려봤다. 딱히 주관적이지도 객관적이지도 않은 시선으로 한 소녀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이 영화의 감수성은 무엇일까. 


'라떼는 말이야'같은 감성으로 이야기를 건넨 것은 분명 아닐 거다. 90년대에 성장기를 보낸 사람은 모두 이러했다고 주장하는 것 또한 아닐 거다. 누군가의 기억 한편에 자리 잡은 평범한 일상이라는 것은 이런 거다라고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모두가 그렇다고 외치는 게 아니라, 그냥 그런 삶이 있었다고 살며시 누군가의 일기장을 꺼내어 놓는 것 같은 태도로. 다분히 뚜렷한 의도를 담은 장르에 익숙해져 있던 나의 감수성은 이 영화를 한 번에 받아들이지 못했다. 일기장에서 심오한 기획 의도와 컨셉을 발견하려 애쓰는 사람 같았다고 해야 할까.


누군가는 말한다. "그래서 김지영은 미친 거야?" 라던지 "그래도 영화보단 우리의 삶이 낫잖아." 혹은 "저렇게 잘생긴 남편을 두고 우울증이 왜 오지?"라고. 얼마나 많은 것들을 다르게 경험하고 바라보았는지 실감하게 하는 말들이다.


나는 영화가 끝나고 들린 화장실 칸 안에서 혹시나 몰카가 있을지 미심쩍어 주위를 두리번거렸고  내게 곧 다가올 육아의 일상을 잠시 그려봤으며, 공유의 잘생김보다는 아이를 낳으면 '도와주겠다'라고 말하는 대사가 더 기억에 남았다. 


사람들은 모두 스스로를 평범하다고 느낄지 모르지만, 모든 것은 각자의 감수성에 따라 다르게 기억될 뿐이다. 모두가 비슷한 걸 경험하고 똑같이 느낄 수 없으며 그럴 필요도 없다. 그럼에도 이 보통의 감수성이라는 건 내가 살아가는 지금 이 순간 이 곳을 이야기해주는 어떤 중요한 단서처럼 느껴진다. 왜 그 사람은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는지, 나는 왜 이런 표정을 짓게 되었는지를 말해주는 단서. 서로 다른 곳에서 다른 걸 바라보고 있다는 것, 그럴 수밖에 없는 수많은 굴레들이 존재한다는 걸 안다는 것만으로도 '보통의 감수성'을 지녔다고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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