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6개월이 되던 때에 이유식을 시작했다. 온갖 좋아 보이는 이유식 조리 도구들을 모두 구비한 후 인터넷과 육아 서적을 뒤져가며 치밀하게 한 달 치 식단을 짰다. 하지만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게 육아라고 했던가. 야심찬 나의 포부와는 다르게 시작부터 변수가 생겼다. 유기농 백미로 만든 미음에서부터 아이는 입 주변이 빨개졌다. 쌀로 이유식을 시작하는 이유는 가장 알레르기로부터 안전한 식재료이기 때문이다. 2-3일 먹이고 별 반응 없이 괜찮으면 그다음 식재료를 추가하여 먹이기 시작하는 게 이유식의 단계다. 그러나 우리 아이는 쌀 미음만 일주일을 먹었다.
피부가 예민한 아이였다. 가지를 먹고도 입이 빨개졌다. 후기 이유식을 하던 10개월 때쯤엔 등에 아토피 자국이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엔 심하지 않아 아토피일 거라는 생각을 못 했고 환절기라 그런가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며 등에 하나 있던 자국이 목에도 하나 허벅지에도 하나 생겼다. 슬슬 불안해져 소아과에 가서 물어보니 아토피가 맞는 것 같다고 했다.
유난의 서막은 서서히 오르고 있었다.
집안 청소 및 위생 관리, 피부 보습 관리, 습도와 온도 관리, 식재료와 유기농 등 아이의 일상을 둘러싼 모든 것들에 신경을 썼다. 그때 즈음 환경에도 막 관심을 갖기 시작한 때였다. 아토피와 자연친화적 생활 방식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다. 온 우주의 기운이 내게 친환경적인 삶을 살라고 등 떠밀고 있었다. 결국 엄마라는 존재가 된 건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던 거다.
이유식은 물론이고 식재료조차 플라스틱 용기에 담지 않았다. 모든 식재료는 유기농으로 구매했다. 아이가 먹은 삼시 세끼를 매일 사진으로 찍어 기록으로 남겼다. 아토피를 졸업한 세 살이 될 때까지. 24개월이 넘어서까지 무염식을 유지했다. 19개월부터 어린이집을 다녔는데 계란 흰자 알레르기가 있어 간식을 만들어서 보내고 반찬도 따로 싸줬다. 가공식품도 거의 먹이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이 돌이면 졸업하는 떡뻥을 24개월까지 먹였다. 누가 젤리나 사탕을 주려고 하면 아토피가 있어서 못 먹는다고 거절했다.
36개월까지 외출할 때마다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녔다. 유기농 쌀로 빵을 만드는 곳이 없어 책을 보며 어설프고 건강한 빵을 만들어먹였다. 떡도 만들고 쿠키도 만들었다. 청국장도 만들었다. 요리에 취미도 소질도 없이 만든 못난이 음식들이었지만 아이는 맛있게 먹어주었다. 아이가 다섯 살이 된 지금까지도 요리에 설탕을 넣어본 적이 없다. 원당도, 대체당도 쓰지 않고 오직 조청으로만 단 맛을 낸다.
어차피 나중에 크면 몸에 안 좋은 거 다 먹게 된다는 말을 들었다. 아무거나 다 먹어도 건강하게 잘 자란다는 말도 들었다. 그 말을 건네는 의도는 유난 떨지 말고 적당히 하라는 뜻일 테다. 그럴 수 없었다. 내 아이를 건강하게 키우기 위해 환경과 식재료에 대해 공부하다 보니 도저히 먹일 수 없는 가공식품들이 너무 많았다. 설탕, 감미료, 합성향료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익숙하게 아는 어린이용 가공식품들은 몸에 안 좋은 첨가물 범벅이었다. 모르면 몰랐지 알고도 먹일 수는 없었다.
유난스럽다는 시선이 불편했다. 내가 내 아이 건강하게 키우려고 하는 진심의 노력들을 가볍게 지르밟는 말들이 싫었다. 각자의 기준이 다를 수 있는데 그걸 인정하지 않고 괜찮다고 그냥 넘어가라고 하는 분위기 속에서 존중받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속상했다. 아이에게 좋은 마음으로 무심하게 건네는 달콤한 간식들이 너무 싫었다.
한 번쯤은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그 한 번은 아이에게 입문을 의미한다. 젤리의 달콤함을 맛본 아이는 다시 그것을 알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영상이라는 재미있는 세계가 있다는 걸 아는 아이가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려놓는 과정은 필요했다. 아이는 어린이집을 다녔고 졸업 후 유치원에 입학했다. 단체 생활을 하며 세상에 대해 조금씩 눈을 뜨기 시작했고 속세의 맛도 알아갔다. 집에서는 여전히 오트밀도, 누룽지도 잘 먹지만 유치원 생일잔치에서 먹는 초코 케이크를 기대하는 아이가 되었다. 마이쭈도 먹을 줄 알게 되었고 식당 밥이 주는 감칠맛도 즐기게 되었다.
처음엔 변화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아이가 언제가 크면 이것저것 다 먹게 될 거라는 걸 알았지만 그 속도가 내 예상보다 빨랐다. 특히 다섯 살이 되며 변화에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빵집을 그냥 지나가지 못하게 되었고 동네 아이스크림 가게도 하나둘 섭렵하기 시작했다.
식탐이 많고 먹성이 좋은 아이라 먹고 싶은 게 많았다. 아이가 원하는 건 점점 더 많아졌고 몸에 안 좋아서 안된다는 말을 자주 하게 되었다. 아이는 울고 떼를 썼다. 어린이집 담임 선생님과 통화를 하다가 아이가 친구와 투닥거린 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선생님은 아이에게 먹고 싶은 걸 너무 제한하면 아이가 참기 힘들어 다른 쪽으로 안 좋게 표현할 수도 있다고 말씀하셨다. 네 돌이 얼마 남지 않은 시기였다.
그때부터였다. 나는 한 발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나의 울타리는 넓어졌고 아이의 선택은 조금씩 자유로워졌다. 소프트아이스크림도 사주게 되었고 얼마 전에는 편의점 아이스크림도 처음으로 사줘 봤다. 신세계를 경험한 아이의 표정은 설렘으로 가득했다. 좋아하는 모습이 귀여우면서도 내 속에선 무언가 거대한 성이 와르르 무너지는 허탈함을 느꼈다. 영화 <인사이드 아웃 2>를 보면 사춘기를 맞이한 라일리의 내면이 이전과는 다르게 완전히 재편되고 새로운 감정 세포들이 자리를 잡는다. 그만큼은 아니겠지만 엄청나게 거대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은 분명했다.
서서히 내려놓는다고 했지 완전히 놓는다고는 안 했다. 아이는 여전히 피부가 예민하다. 아토피는 졸업한 지 오래지만 환절기엔 발을 긁는다. 여름엔 종종 땀띠가 나기도 하고 걷다가 갑자기 발이 가렵다고 울며 떼를 쓰기도 한다. 그럴 때면 느슨했던 마음을 다잡기도 한다. 일하며 아이 키우는 바쁜 일상이라 완벽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건강하게 키우는 방향만큼은 놓지 말자고 다짐한다.
비록 과일을 갈아 직접 만든 아이스크림이 성에 안 차 젤리를 또 찾는다고 해도 괜찮다. 가끔 주스나 아이스크림을 사 먹인다 해도 원재료명을 꼼꼼히 확인한 후 조금이라도 건강한 걸 선택하는 습관은 변함없을 것이다. 아이가 좋아하는 식당에 가서 한 끼 먹이더라도 해마다 돌아오는 여름엔 직접 갈아만든 콩국수를 꼭 먹일 거다. 웬만하면 생수보다 끓인 물을 텀블러에 담아 먹이는 것도 여전할 테고.
어릴 때 먹었던 건강한 음식 경험이 장기기억 저장소에 가지 못하고 어두컴컴한 무의식의 세계로 간다고 해도 괜찮다. 버려진 것도 사라진 것도 아닐 테니. 아이의 몸 안 어딘가에 차곡차곡 쌓일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