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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도 헤도헨 Mar 29. 2024

딸의 생파는 처음이라

엄마로서지만 다르게 살아볼 수 있다는 점에서

어제 8세 셋째의 생일파티를 열어줬다. 딸과 초대된 친구 8명은, 하교 후 속속 도착하여 놀다가, 저녁을 먹고, 케이크 앞에서 생일축하를 하고, 선물을 주고받고, 남편의 셔틀을 타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이런 일은 처음이다. 그러니까 첫째에게도, 둘째에게도 이런 생일파티는 없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나.





12년 육아에서 뼈에 사무치는 후회를 두 번 했는데, 그중 하나가 첫째의 돌잔치를 파티하우스에서 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통탄의 유치원 졸업식")


우리보다 반년쯤 먼저 첫 아이를 낳은 동서네가 그렇게 돌잔치를 했고, 그보다 반년 전엔 동생네 둘째 돌잔치에 갔었다. 조리원 동기들 모두가 그런 돌잔치를 준비했고, 정보를 묻고 공유하느라 바빴다.


이 중요하고도 거대한 행사는 마치 결혼식처럼 미리, 최소 몇 달 전에 장소를 비롯해 이런저런 서비스를 예약해야 하고, 사진이나 의상 등 크고 작은 준비를 해야 하며, 손님들께 일정을 알려야 한다. 나는 말 그대로 홀린 듯이, 다른 길이 있는 줄도 모르고, 그에 대해 생각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한 채, 돌잔치라는 모두가 타는(착각이었다) 열차에 올라탔다.


오랜만에 예복을 입고 출장 미용사를 불러 머리도 만지고 풀메이컵을 했다. 따로 부른 전문사진사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내 아이를 보여주고 한껏 축하를 받으며 주인공이 되는 시간은 즐거운 구석이 있었다. 그동안 집에 틀어박혀 엄마로만 산, 그 충격과 고달픔의 시간들에 대해 잠깐 위로와 보상을 받는 느낌도 들었다. 또, 태어나 차차 자라서 20대에 마구 피어났다가 결혼식에서 그야말로 정점을 찍고 (적어도 사람들의 관심과 주목을 받는 부분에서) 뭔가 인생의 내리막길을 걷는 듯한 기분이었는데, 웬만해선 다시 맛볼 수 없는 그 맛을 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사람들의 눈빛과 태도에는 묘하게 어색하고 나를 불편하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뭘까... 왜일까...


얼마간의 세월이 지나 김영하의 책이었나 인터뷰였나, '절대 안 가는 자리 중 하나가 남의 돌잔치'라는 말을 듣고, 처음엔 당황했다가 곧 어떤 깨달음 같은 게 왔다. 그가 그 이유를 덧붙였는지 아닌지 기억나지 않는데, 알 것 같았다. 혹은 확실히 동의가 됐다.


결혼식엔 못 가도 장례식엔 가란 말이 있는데, 이 말은 예나 지금이나 유효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 돌잔치는 어떨까. 옛날엔 조금 달랐겠으나, 요즘엔 결혼식에 비하면 더욱 참석할 이유를 찾기 어려운 남의 잔치가 아닐까. 물론 직계가족이나 어떤 특별한 관계에서는 남도 '부모 같은' 마음일 수도 있고, 개인적인 상황에 따라 그런 공식적인 축하의 자리가 필요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할 일 많고 바쁜, 쉬기에도 빠듯한 주말에 괜한 일로 사람들을 불러모았었다는 생각을 뒤늦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좋게 해석해도, 결국엔 나를 드러내고 자랑하는 자리를 유난하게 만들었을 뿐이라는 부끄러움도 들었다.


그제야 첫째의 돌잔치 때 내가 무엇 때문에 어색하고 불편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들은 웃는 얼굴로 와서, 아이를 귀여워하고, 우리에게 축하의 말을 건네며 선물(돈이나 금)을 준다. 맛있게 먹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 가는 것 같다. 그러나... 내 마음과 같은 기쁨, 우러나와 넘치는 축하와는 괴리가 있었다. 그런 건 사실 서로에게 기대할 게 아니란 것을 나는 정말 몰랐다. 인간관계의 한 비즈니스가 되어 부지런히 서로에게 빚을 갚고, 지우는 현장이었다. 나 같은 사람에겐 맞지 않는 행사였다.





인생에서 실수와 잘못은 당연한 일인데,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저질렀단 생각 때문에 오래 후회했다. 다행한 일인지, 내겐 같은 일을 다르게 할 수 있는 기회가 두 번 더 있었다.


둘째는 다니던 교회에서 간단하게 치렀다. 둘째를 임신한 상태에서 다니기 시작한 교회였고, 서른 명 정도의 작은 교회라 아이는 많은 사랑을 받았다. 마침 생일이 일요일이라 예배 후 늘 하던 식사를 대신 대접하고 돌잡이를 하는 정도로 하고, 남편과 나의 삼촌 이내의 가족만 초대했다. 사진은 교회의 사진 잘 찍는 청년이 찍어주었던가?


셋째는 우리 식구, 시어머니와 친정엄마, 이렇게 7명이 모여 식사를 했다. 그리고 돌잡이까지만. 사진은.. 남편과 내가 핸드폰으로 몇 장. 몸도 마음도 훨씬 편하고 좋았다. 물론 '여력'의 문제이기도 해서, 힘을 그러모아 뭔가 더 해야 하나 잠깐 고민했다. 하지만 간단한 돌잔치를 하면 셋째에게 미안한가? 엄마로서 아쉬운가? 스스로 물었을 때, '전혀!'라고 확실히 대답할 수 있었다. 아이가 이 세상에, 특히 우리 가족으로 와서, 한 해를 무사히 보낸 형언할 길 없는 기쁨을 같은 마음인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것이면 되었다.





그런데 돌잔치가 끝이 아니었다. ‘생일’에 관하여 사람들이 다들 어떻게 살아가는지, 부모 노릇은 어떻게 하는 것인지 지나야 할 관문이 또 있었던 것이다.


첫째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생일파티에 초대되었다. 엄마인 나도. 초대한 엄마는 키즈카페를 통째로 빌려,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음식을 잔뜩 주문했다. 3월이라 거의 반 아이들 모두를 초대했는데, 엄청나게 많은 아이들이 정신없이 놀고 먹는 모습을, 그만큼의 엄마들이 놀랍도록 흐뭇한 얼굴로 앉아 지켜보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었다. 그때 나는 육아우울증이 심해져가고, 번아웃으로 정신과에 다니기 직전이었는데, 거기서 내가 어떤 얼굴로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큰 실수나 결례를 저지르지 않았기를 바라는데... 이후 그런 초대가 뜸해진 것이 우연인지 아닌지, 다행한 일인지 씁쓸한 일인지 모르겠다.


'나도 생일파티를 열어달라'는 첫째의 요구를, 필사적으로 알맞은 이유를 찾아내서 들어주지 않았다. 나는 그런 식의 생일파티는 도무지, 영, 무슨 수를 써도 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생일은 해마다 돌아오는 거라, ‘생일’만 떠올리면 골치가 아파질 것 같아서 골치가 아파지려는데, 이듬해 코로나 시국이 열렸다. (나는 이 부분에서만큼은 진심으로 코로나에게 감사하는 마음이다.)


코로나 시국이 어영부영 끝나려던 지난해에도, 생일은 그전처럼 지나갔다. 여전히 거대 생일파티는 어렵고 괴로운 일이었고, 누군가를 집에 초대하는 일 역시 불편하고 신경 쓰이는 일이라 꺼려졌다. 나는 아이가 먹고 싶은 걸 해주고, 가고 싶은 곳에 함께 가고, 하고 싶은 걸 하게 하고, 갖고 싶은 걸 사주면서 충분하기를 바랐다.


그리고 이번 해. 아이의 생일을 앞두고 전처럼 ‘먹고 싶은 것/갖고 싶은 것/하고 싶은 것/가고 싶은 곳’ 목록을 작성하라고 말했는데.. 어떤 생각이 가만히 들었다.




초등 6년 동안, 생일파티를 안 하고 넘어갔네..
앞으로 친구들 초대하는 생일파티가 있으려나?



나의 어린 시절을 돌아보면, 초등학생 때, 특히 저학년 때는 친구 집 생일파티가 흔했다. 초대를 받고 기뻐하고, 선물을 사서 포장하고, 기대에 부풀어 친구 집에 가서 맛있는 거 먹고 즐겁게 놀고... 하지만 초대받는 일은 갈수록 드물어졌고, 중학교, 고등학교로 가면서 그런 일은 아예 없었다.


하지만 나는 한 번도 내 생일파티를 가진 적이 없었고, 그런 것을 바랐던 기억조차 없을 만큼 머나먼 세계의 이야기였다. 생일파티라는 게 마냥 어렵게 느껴지고 피하고만 싶은 건... 그런 무경험의 경험 때문은 아닐까? 아이가 커가면서, 자신의 홈그라운드에서 축하와 선물을 받으며 공식적으로 주인공이 되는 경험은, 그 사소하다 싶을 만큼 짧은 하루의 경험은 그런 일에 덜 비장한 사람이 될 수 있게 하지 않을까?


그런 일을 치르는 것은 내게 너무 막연하고, 그래서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집을 조금만 정리하고, 음식을 내가 하거나 배달하거나 해서 마련한 다음, 친구들과 집에서 놀 수 있도록 허락만 해주면 되는 게 아닐까?


그래서 그러라고 했다. 그랬더니 순식간에 최대 인원이라고 말했던 10명을(감이 없었다...) 초대하고, 먹고 싶은 것을 조사해서 목록으로 만들어왔다.


그 순간, 내가 뭔가 큰일을 벌인 것 같으면서도, 의욕이 솟았다. 꽤 재미날 것 같았다.


그런데 셋째의 생일은 첫째 생일의 이틀 전. 어차피 집을 정리할 거면... 비도 온다는데 어디 갈 게 아니라, 얘도 생파 해줘?


이 아이도 당장 최대 인원이라 했던 5명(처음엔 엄마들을 세트로 초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을 채우더니 빠진 친구들을 두고 어쩔 줄 몰라했다. 가만, 이제 초등학생인데 엄마들 없이 놀 수 있잖아? 싶어서 8명까지로 하고, 삼겹살 러버 남편에게 의견을 묻는 듯 도움을 청했다. (“얘네들은 어려서 배달음식보다는 집밥을 줘야 할 것 같아. 삼겹살을 구우면 어떨까?”)


그리하여 셋째는 언니들을 제치고 처음으로 생일파티를 갖게 되었다. 아이마다 다르게, 다른 것을 준다.





어제 아이들은 우리집 문 앞까지 엄마 손을 잡고 왔다. 상기된 얼굴로 들어와서, 잘도 놀았다. 아주 가끔 소수의 아이들이 인형놀이를 하느라 조용한 잠깐도 있었지만, 대체로 정신을 혼미하게 할 만큼 날뛰며 놀았다(방송에서 "관리사무소에서 알립니다." 하는 순간, 우리 때문인 줄 알았다. 역시나였다. "우리 아파트는 공동주택으로서...") 첫째는 친구랑 논다며 대피하고, 둘째는 신이 나서 선생님처럼 놀아주었다. 남편은 다리가 후덜거릴 정도로 이런저런 걸 세팅하고 고기를 구웠다.


나는 꽤나 흥분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에너지가 샘솟는 상태로 아이들을 맞이하고, 엄마들에게 후기를 전했다. 그리고 뿌듯한 마음으로 잠들었다가, 한밤에 깨서 구토를 했다.


보통 일이 아니었나 보다. 내 인생에, 친구를 초대하는 생일파티는 처음이라.


두 시간 후면 시작될, 첫째의 생일파티는 어떠려나. 좀 큰 아이들이니까 덜 정신이 없을까. 아니면 다른 의미에서 감당하기 벅찰까. 어쨌거나 나는, 기대되고 재미있는 마음이다. 무언가 내 인생에서 하나를 배운다는 점, 바꿔본다는 점, 엄마로서지만 다르게 살아볼 수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내가 (물론 수면 부족과 아직 남은 복통으로 비실비실하지만,) 그것을 감당할 상태인 것이 진심으로 감사하다.



“이모, 여기는 식당 같아서 좋아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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