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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도 헤도헨 Apr 19. 2024

아이들이 없는 밤

변하지 않을 줄 알았던 것들

엄마가 되고 달라진 처지의 핵심은, 내 몸이 내 것이 아니고 내 시간도 내 것이 아니라는 감각이다. 땅거미가 지듯 서서히 다가오다, 정신을 차려보면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눈앞이 캄캄한데, 당연히 물릴 방법은 없고, 어쩌자고 아이는 이뻐서, 자연스레 드는 생각과 마음들은 인지부조화와 자아분열로 서로를 홀대한다. 그러니 대체로 내면은 시끄럽고 힘이 없다.


그 상태가 오래가면 자아감은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고, 그럼 결국 자아도 흐릿해지거나 부서지게 마련이다.


그러니 나르키소스처럼, 스스로를 비추어보며 타인처럼 바라보고 인류를 대표하여 자신을 추앙하는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것을 나는 너무 늦게 알았다.





번아웃과 우울증으로 내가 고장이 나고서, 내게 혼자만의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나도, 남편도 알게 됐다. 나의 정신적 안녕이 우리 가정에 얼마나 중요한지도. 언젠가부터 남편은 세 아이를 데리고 주말에 시댁으로 떠났다. 하루 혹은 이틀을 자고 왔다.


그 시간을 나는 아주 알차게 탕진했다. 생산적인 일은 단 하나도 하지 않았다. 문 밖엔 나가지도 않았고, 책은 펴지도 않았으며, '일'이라고 할 만한 건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먹는 것도, 씻는 것도, 자는 것도 최소화했다. 시간을 모르는 것처럼 지내면서 멍하니 있는 시간도 아까워했다. 주로, 토할 것 같을 정도로 영화와 드라마와 예능을 봤다. 잠깐만 막 살자. 바르게 살 의욕을 충전하자.


잘 다녀오라고 손을 흔들고 현관 문의 걸쇠가 '철컥' 걸리는 순간, 마법처럼 세상의 색깔과 공기가 바뀌었다. 나는 고요하고 적막한, 나밖에 없는 세상에서 왕이라도 된 것처럼 부러울 게 없었다.


그 기쁨은 변하지 않을 줄 알았다.





3-4년쯤, 그렇게 주기적으로 혼자만의 밤을 가졌다. 언젠가부터 나는 이런 밤을 덜 고대했고, 막상 세상의 색깔과 공기가 바뀌는 마법의 순간이 와도 덜 흥분했다.


지난번에는 문을 닫고 돌아서는데, 세상이 가벼워진 게 아니라 희미해졌다고 느꼈다. 달라진 기운이 낯선 것 같기도 하고 뭔가 알 것 같기도 했다. 그대로 거실 바닥에 앉아 가만히 있었다.  


지금까지는 이런 시간이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얼마나 좋으냐고 방방 뛰고 구르며 방실방실 웃었다. 그런데 문득 마치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깨달은 사람처럼 자는 시간도 아까워진 것이다. 그러니 꿈이 다 무슨 소용이야? 꿈인데.


아이들이 내 곁을 떠나는 것은, 그리하여 집에 나 혼자 남는 것은 필연적으로 오는 일이다. 그런데 아주 길게만 느껴졌던 그때까지의 시간이, 어쩌면 충분히 길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엄습했다. 아니, 분명히 그럴 것이다. 충분할 리가 없다.


나는 바로 전날까지도 귀찮게 여겼던 사소한 의무들과 쉴 새 없이 말을 거는 목소리와 웃으며 다가오던 얼굴들이 마구 그리워졌다. 오히려 그때가 꿈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니, 멀지 않은 미래에 나는 분명히, 사소한 의무들과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말과 웃는 얼굴에 둘러싸여 있던 날들을 떠올리며, 꿈을 꾸었던가, 하고 헛헛해할 것이었다.


이런 순간엔, 내가 육아의 한가운데서 얼마나 힘들었었는지, '사라지고 싶다'는 말을 어떤 마음으로 되뇌었는지 까맣게 잊는다. 그러고는 아이를 얼마나 내 손으로 만지고 싶었는지, 내 눈으로 보고 내 품에 안고 싶었는지, 내가 붙인 이름을 부르고 싶었는지... 평생 모든 소원과 소망을 다 합쳐도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원했는지, 기어코 생각해낸다.


나는 왜 이렇게 바보 같은지, 왜 이렇게 간사한지.


오늘 밤도 그런 날이다. 첫째와 셋째는 남편과 함께 시댁으로, 둘째는 합숙훈련 하는 태권도장으로 떠났다. 고요하고 적막한, 나밖에 없는 세상에서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글을 쓴다.



자식들 품 안의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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