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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도 헤도헨 May 20. 2024

3주. 검색이라는 이름의 그네

준비를 하려다 덜미를 잡히는 수

자, 지금 엄청난 창작을 시작하려는 참이라고 가정해보자. 책상 앞에는 원고지 뭉치가 머리 높이만큼 쌓여 있다. 당신은 원고지를 보며 나보코프가 말한 대로 '분명한 윤곽'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을지 모른다. 또는 쓰려는 것에 대해 막연한 느낌만 가지고 있을지도 몰라 이자크 디네센이 말한 '충동'으로부터 시작하고 싶어할 수도 있다. 올더스 헉슬리는 '희미한 생각'만을 가지고 작품을 쓴다고 했다. 윌리엄 포크너는 '기억 또는 정신적 그림'을 가지고 시작한다고 말했다. 좋다. 처음부터 다 알고 있든 아무것도 모르고 있든 마찬가지다. 거기엔 희망이 없다.

ㅡ로널드 B. 토비아스,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 스무 가지 플롯>



이번엔 정말로 달리기로 결정했다. 생각했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달릴 때까지 달린 게 아니다.


달리려고 일어났지만, 옷을 고르다 그대로 주저앉을 수 있다. 옷을 입었지만, 신발을 신다 현관에서 멈출 수 있다. 문을 나섰다가, 달리기도 전에 되돌아올 수 있다. 결국 달렸지만, '달려는 봤다'로 끝날 수 있다.


나는 내 삶에 달리기를 들여놓는 '엄청난 창작'을 시작할 참이었고, 정말로 달리기 위해, 제대로 달리기 위해, 끝까지 달리기 위해, 어떤 장애물에도 걸리고 싶지 않았다. 로널드 B. 토비아스가 말하려고 한 것은 '플롯'이지만, 나로서는 희망이 있든 없든 시작하기 전에 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하려고 했다. '충동'은 확실히 있었고, '희미한 생각'도 가지고 있었다. '기억 또는 정신적 그림'은 대강 있다고 쳤다. 마지막으로 '분명한 윤곽'을 머릿속에 그려보는데...



우선, 달리려면 복장이... 운동복을 사야겠군.

가만, 운동화가 제일 중요하잖아? 초보자용 최적의 러닝화가 있을 텐데.

핸드폰은 어떡하지? 주머니에 덜렁대게 두고 뛸 순 없어. 들고 뛸 수도 없고. 분명 도구가 있을 거야.

달리기 양말이 따로 있나? 모자를 써야 할까? 선글라스는?



나는 목표한 바로 나를 데려다줄 검색의 열차에 기꺼이 올라타, 가벼운 마음으로 손가락을 두드렸다. 하지만 내가 본 것은 흐릿하고 조잡한 우주였다. 정답을 찾기 위해 갈수록 손가락은 맹렬해지고 마음은 깐깐해졌다. 하지만 어떻게 해도 '운동복은 이것, 얼마, 여기서 사면 됨' 이렇게 깔끔한 결론에 이르지 못했다. 운동화도, 모자도, 양말도, 가방도. 그 어떤 것도.


굉장히 익숙한 피곤함에 정신을 퍼뜩 차렸다. 이러는 사이 달렸겠는데?


핸드폰을 내려놓고 직접 매장에 가서,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입어보고 신어보고 사기로 했다. 첫날 달리기를 매장까지 가는 걸로 루트를 잡았다. (결과야 어쨌든 잘한 일이었다. 준비되지 않은 채로 시작할 합리적인 핑계였으니까.) 옷장에서 가장 운동복 같은 옷을 꺼내 입고, 신발장에 뒹구는 적당히 낡은 운동화를 꺼내 신은 다음 첫 달리기를 했다. 장애는 없었다. 어쨌거나 스포츠용품을 파는 매장에 당당하게 들어갔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입어보고 신어보았다. 그러나,


역시 알 수 없었다. 나에게 맞는 것도, 나에게 필요한 것도 모르겠고, 심지어 내 스타일까지도 묘연했다. (이 영역에서는 아무 경험이 없었으니까. 고로 성공의 데이터도 실패의 데이터도 전무.) 턱없이 비싼데 그만 한 값어치를 하는지, 아니면 적어도 가성비를 따져 괜찮은 게 무엇인지도 까마득했다. 나는 여러 매장을 들락날락하며 몇 바퀴를 돌았다. 그리고 다시 핸드폰을 꺼내 검색을 했다. 좀 더 구체적인 검색어를 넣고.


몹시 친숙한 고단함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러는 사이에 달렸겠다고!


돈을 들여 실패하지 않으면 영원히 알 수 없다는 진리를 부여잡고, 개중 마음이 끌리는 옷과 양말을 (생일선물 명목으로) 샀다. 이미 예산을 초과해서 운동화는 관두기로 했다. 핸드폰을 넣을 가방(러닝벨트)은 세 아이들에게 생일선물로 사달라고 하기로 했다. (생일 만세..)





맛집을 찾고 학원에 등록하고 출산을 하고 여행을 가기 전 나는 언제나 깐깐하고 맹렬한 검색을 했고, 그림이 그려지면 안심했다. 뿌듯할 뿐 아니라 행복하기까지 했다. 준비한 만큼 더 효율적으로 시간과 에너지를 쓸 것이고, 예상치 못한 상황을 덜 맞이할 것이었다. 그러니 더 누리고 덜 고생할 것이었다.


하지만 주어진 정보량이 많을수록, 아니 말 그대로 정보가 '끝도 없이' 많아진 세상에서는 이 상관관계는 흩어졌다. 그래프의 곡선이 '검색하는 데 들이는 시간'이 많을수록 '효용/만족도'가 올라가는 비례의 방향이 아니라, 어느 순간 제자리걸음을 하다 곤두박질치거나 아예 펑, 사라질 때도 있었다. 준비를 하려다 덜미를 잡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검색은 열차가 아니라 그네였다. 훌렁훌렁 타면서 가만히 섰을 땐 안 보이는 걸 조금 쉽게, 재미있게 볼 수 있으면 됐다. 당연하게도 그네만 타서는 아무리 오래, 아무리 많이 타도 아무 데도 갈 수가 없다. 그리고 보기만 한 것과 가서 만난 것은 같을 수가 없다.


검색은 그만두고, 첫날 준비한 대로 지금까지 달리고 있다. 아직까지 문제는커녕 아쉬움도 없다. 오히려 철저하지 못한 준비 덕택에 알게 되는 것들이 있었다. 그게 또 그렇게나 알차고 재미질 줄은. 역시 희망은 실세계에서 맛보는 것이다.




요약

달리기를 해본 적 없다면, 바로 그렇기 때문에, 철저한 준비는 불필요하고 불가능하다.

아무 옷을 입고 아무 운동화를 신고 달리다 보면, 내게 알맞게 미세조정된 정보가 보일 것이다.

핸드폰을 가지고 달릴 거라면 러닝벨트/암밴드/러닝조끼를 쓸 수 있다. (나는 러닝벨트밖에 몰라서 '나이키 러닝벨트'를 샀는데, 착붙은 아니어도 유용하다.)



사진에 기록을 넣어주는 기능이 런데이 앱에 있었다.


날씨가 좋으면 생각한다. 달리러 나가야겠는데? 언제까지 이럴지 모르겠으나, 이럴 땐 이렇게 해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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