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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도 헤도헨 Jun 03. 2024

5주. 나의 내리막길

이쯤에서 뒤통수를 후려쳐준 달리기에게

그저 물 흐르는 대로 살다 보면 삶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알 수 없다. 40세가 되면 달리기 선수들의 생체시계는 한물갔다는 뜻에서 '언덕을 넘었다'라고들 말한다. 이 나이가 되면 궁금해진다. 힘을 다할 수 없는데도 계속 달려야 할지, 아니면 쉬어야 할지 말이다.

/베른트 하인리히, <뛰는 사람>



지난날의 내 언행을 떠올리며 가끔 코웃음을 친다. 그중 최고봉은 열다섯 살 때, 내가 사랑했던 국어선생님 앞에서 했던 말이다. "선생님, 저는 겪을 거 다 겪어본 거 같아요. 더 산다고 삶에 무슨 재미가 있을까 싶어요."


다행히 친애하고 존경해마지 않는 나의 국어선생님은 비웃지 않았다. (어이없고 우습지 않았을 리 없지만) 40대 중반쯤의 그녀는 그냥 조금 무덤덤하게, 그래도 세상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많은 일이 벌어지는 곳이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도 나는 '훗, 그런가요.' 정도의 의미로 고개를 까딱했다.


그런 식의 오만방자함을 중2였던 탓으로 돌리고 싶지만, 이후로도 나는 종종 비슷한 생각을 했다. '아, 이제 대충 알 것 같아. 그만하고 싶다.' 계산 잘하고 똑똑한 양 이런 표현을 쓰기도 했다. "앞으로 분명 내가 전에 몰랐던, 예상치 못했던 행복과 기쁨이 있겠지. 반대로 괴로움과 참담함도. 전자의 총량이 후자의 총량보다 많다 해도, 그게 확실하다 해도, 더 살고 싶지 않아. 미련 따위 없어.'


그런 생각은 가장 치열하거나 힘든 순간이 아니라 그때가 지나고 가만히 숨을 내쉬는 중에 들곤 했다. 최근 2-3년, 30대를 세 아이를 키운다고 내가 아닌 것처럼 살다 마흔을 넘기면서 또 그랬다. 이제는 정말 삶의 반을 살았고, 내리막길이 분명한 삶을 내려다보면 하품이 나올 지경이었다. 사람을 셋이나 만들어놨으니 할 일은 다한 게 아닐까? 그럼 그만둬도 되지 않을까?


그래도 맡은 일에 대해 꽤나 성실한 타입인 나는, 나의 세 딸이 내 나이가 되는 동안 나의 친정엄마만큼의 존재는 되어주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버티는 중이었다. 엄마라는 벗지 못할 탈을 쓰고도 또렷이 이기주의자인 나는 그런 식으로는 삶이 살 만한 게 못 됐지만, 맛있는 거 먹는 맛으로, 재밌는 거 보는 재미로, 안 가본 데나 가볼 요량으로 어찌어찌 가느다랗게 살아 있자, 그렇게 나를 달래고 있었던 것 같다.





그게 달리기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 달리기로 인해 생기는 미세 손상은 잘 알려져 있기에 달리기 선수의 몸이 소진된다는 가설에는 일말의 타당성이 있다. 하지만 운동이 건강을 유지하고, 운동 능력을 향상하는 자극의 역할을 한다는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어쩌면 손상에서 오는 확실한 자극이 없을 때는 노화 작용이 너무 경미하고 완만하게 일어나 치료 반응을 일으키기에 불충분하므로 아주 천천히 축적되어 노화를 야기하는 걸지 모른다. ... 이를 집에 비유해보자. 집을 관리하고 손보는 사람이 없다면(집의 규모나 건축 방식, 환경 등에 따라 다르긴 하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먼지, 습기, 곰팡이 같은 물질이 쌓이고 스며들어 서서히 그러나 꾸준히 부식될 것이다. ... 만약 어떤 이유로든 원상태를 유지해야 한다면 일정 수준 이상으로 망가졌을 때 이를 감지하고 수리할 거주자가(혹은 메커니즘이) 있어야 한다. ... 집 상태의 변화를 알아채는 거주자의 민감도가 주택의 부식 속도와 붕괴 시점을 결정한다는 말이다.

/같은 책



달리기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적어도 6개월은 달리기로 했을 때, 그리고 달리기를 시작한 이후로 점차 재미가 붙어 러너 꿈나무를 자처했을 때, 시행착오와 우여곡절은 당연히 예상했다. 그런데 나는 왜, 한 달이 되기 전에 무릎이 아파 브레이크가 걸리자 그렇게도 당황했을까?


무릎보호대를 사려고, 알맞은 사이즈를 재기 위해 (인터넷 상품 설명서에 나오는 대로 무릎 위 10센티) 허벅지의 둘레를 줄자로 쟀다. 같이 달리는 남편 것도 사주어야지 하고 남편의 허벅지 둘레도 쟀다. 오, 이런. 내가 남편보다 굵었다. 밀도의 문제로, 순전히 살덩어리의 부피가 컸다. (남녀의 차이일지도 모르고 체형의 차이일지도 모르지만, 어쨌거나 남편보다 몸무게도 적고 종아리도 가는 내가 허벅지가 더 굵을 줄은... 그것도 살이 많아서.)

 

달리기를 하지 않던 사람이, 아직 달리기 근육이 갖춰지지 않은 채로 무작정 많이 달렸을 때 무릎에 탈이 난다고 내 상황을 파악하고 난 후, 나는 '무작정 많이 달렸을 때'에 방점을 두려고 했다. '달리기 근육이 갖춰지지 않은 채'라는 건, 달린 적이 없으니까 당연하잖아.


그런데 말 그대로, 무릎 주위의 근육이 부족했던 것이다. 무릎 통증과 이를 위한 운동치료에 대한 영상을 보면 볼수록(내 유튜브 알고리즘은 '무릎 통증/연골연화증/무릎 운동'으로 뒤덮였다), 내가 무릎이 아픈 이유도, 아프지 않게 할 방법도 허벅지와 엉덩이 근육에 있었다. (쉬지 않고 달린 것은 원인이라기보다 기폭제라고 해야겠지.)


그러니까 영리하고 어리석은 토끼처럼, 열심히 폴짝폴짝 뛰어 산 정상까지 가놓고는, 앞뒤를 보고 하품을 하면서 늘어지게 자는 것도 모자라, 이제 그만한다 그럴까, 더 해봤자 특별할 것도 없는 것 같은데, 이런 한가한 소리나 내뱉는 동안, 내 몸은 경미하고 완만하게 망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래도 괜찮다는 듯이 정신줄을 놓고 있다가, 내가 원하는 만큼도 달리지 못하게 된 내 몸 상태에 좌절하고 후회하다 살짝 머쓱해졌다.


뒤늦게 잠에서 깨어 헐레벌떡 뛰어보지만 거북이한테 역전패를 당하고 땅을 치는 토끼에게, 경주 중에 낮잠을 자면서 이럴 줄 몰랐냐고 묻는다면, 토끼에게 깔끔하게 빙의한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답하겠다. '몰랐지. 미래를 어떻게 알겠어.'


인생이 경주도 아니고(남편도 물론 거북이가 아니다), 언덕이든 산이든 내가 살아나가야 할 길의 어디쯤 와 있는지도 알 수 없지만, 이쯤에서 뒤통수를 후려쳐준 달리기에게 고마운 마음이 든다. 유체이탈자처럼 내 삶에서 빠져나와 천천히 부식되는 내 몸을 보면서, '나이 들면 어쩔 수 없는 거 아니겠어. 오래 살려던 것도 아니었고...'라고 말하던 나의 멱살을 잡고 집 안으로 냅다 던져준 달리기에게. 하지직거상 운동, 미니/월 스쿼트, 클램쉘 운동을 꼬박꼬박 하면서 또 혼자 우스워 죽는다.


달리든 달리지 않든 내리막길도 간다. 내 길이니까. 올라올 때 보지 못한 게 어디 꽃뿐이겠어?




요약

안 하던 운동을 해서 아프게 됐다면, 제대로 보수함으로써 역노화 과정이 일어날 수 있다.(세계적 생물학자이자 달리기 신기록 보유자인 베른트 하인리히 할아버지의 말씀)

무릎 통증을 치료하는 운동으로는 하지직거상 운동, 미니/월 스쿼트, 클램쉘 운동 등이 있다.




5월의 달리기 총정리

산 것: 운동복 2, 운동화 2, 러닝벨트, 무릎보호대(옷은 하나는 브랜드, 하나는 보세. 비교한다고 두 가지 샀는데, 가성비는 보세, 가심비는 브랜드. 신발은 눈 빠지게 검색 후 온라인으로 샀는데 역시 오프라인에서 살 걸 그랬다. 러닝벨트는 핸드폰 넣으면 끝이라서 지금까진 괜찮았지만, 아무래도 다른 게 필요해질 것 같다.)

부상: 무릎(앞무릎 통증/연골연화증)

몸의 변화: 피부가 좋아진 느낌, 조금 탔다. 몸무게는 -0.5kg(그대로라고 봐야...), 눈에 불을 켜고 보면 라인은 달라진 것 같기도?

일상의 변화: 규칙적 일과가 되지 못한 상태지만, 활력을 맛보고 있다.

읽은 책: <아무튼, 달리기>(재밌음), <뛰는 사람>(좋은 책), <오늘부터 달리기를 합니다>(초보자에게 도움 됨), <운동이 내 몸을 망친다>(훑어볼 만함)

총평: 시작하길 잘했다.


나와 남편의 그림자. 허벅지의 실상을 담은..?


사흘 쉬고 한 번씩. 달리고 싶은 마음과 쉬어야 하는 몸의 타협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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