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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도 헤도헨 Jun 10. 2024

6주. 덜 산 아쉬움과 소진의 쾌

하루의 마지막에 달리기를 채워넣는 마음

열두 살 때 친한 친구의 아빠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이 일에 대해 친구는 딱 두 번 언급했는데, 그중 하나가 아빠가 밤새 티비를 본다는 이야기였다. 잠도 자지 않고. 아니, 꾸벅꾸벅 졸면서. 그 말을 들었을 때 '왜 그러신 걸까?' 의아해서 기억에 남았다. 나중에 때때로 그 말을 떠올리며 뒤늦게 이해하곤 했다. 아, 시간이 아까우셨던 거구나. 자는 시간이. 시한부를 선고받고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잠으로 써버리기 싫으셨겠구나.


하도 많이 떠올려서인지, 내 머릿속엔 마치 내가 그분의 딸인 것처럼, 캄캄한 거실에서 티비를 켜놓고 꾸벅꾸벅 조는 그분을 직접 보기라도 한 것처럼 눈에 선하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떠올린 장면만큼이나 내가 짐작한 이유도 실제와는 다르겠구나 싶다.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시한부 선고를 받은 적도 없으면서, 나 역시 흐리멍덩한 눈으로 노트북 앞에서 유튜브와 넷플릭스와 포털을 오가며 밤을 지새우던 날들이 있었다. 육아로 번아웃이 왔을 때 나는 잠 대신 자유시간을 택했다. 하루 동안 나를 위해 한 일이, 내 마음대로 보낸 순간이 없었으니까. 그런 밤이면 친구의 아빠를 또 생각했다. 이런 마음이었을까? 잠을 자거나 자지 않거나 크게 다르지 않을 내일 대신, 모두가 잠든 시간에 혼자 깨어 뭐든 하며 살아있다는 기분을 택하는 것.


나는 죽지 않았지만, 잠을 포기한 대가로 뇌와 몸과 일상이 얼마나 망가질 수 있는지 배워야 했다. 그것은 계속 살기로 했다면 감수할 만한 게 못 돼서, 다시는 절대로 그러지 말자고 다짐했다. 그런데 아직도 가끔 그런다. 습관이 되어버린 걸까?


어느 날 가만히 생각해보니, 내가 하루가 아쉬운 날 그렇게 한다는 걸 깨달았다. 아쉬워서. 오늘이 아쉬워서. 이대로 하루를 끝내는 게 아무래도 아쉬워서. 오늘 크게 웃은 적도 없잖아. 재미있다고 느낀 적도 없잖아. 정신없기만 했잖아. 멍하기만 했잖아.


바쁘게 움직이고 여러 가지를 감당하느라 몸과 마음은 지쳤지만, 내가 정말 나라고 여기는 무언가는 오늘 제대로 살지 않았다. 산 적도 없었다. 그것을 자아라고 불러야 할지 영혼이라 불러야 할지 잘 모르겠다. 어쨌거나 그를 위해 뭐라도 해야 했다. 시간을 써야 했다. 뇌세포가 파괴되고 몸이 상하고 내일의 일상이 엉망이 되더라도 그런 껍데기보다 더 중요한 본질의 나를 위해. 이제는 내 친구 같기도 하고 나 같기도 한, 친구의 아빠가 다시 떠올랐다. 이런 마음이 아니었을까?


그 본질의 자신을 위해 내밀 수 있었던 것이 고작 티비, 넷플릭스나 유튜브였다는 게 생각할수록 서글프다.





지난주 연휴를 맞아 가족여행을 다녀왔다. 아이들을 데리고 하는 여행이란, 돈은 없고 화장실이 급한 채로 백화점에 가는 것과 비슷하다. 마음에 드는 걸 사는 건 고사하고, 무엇이 맘에 드는지 구경할 여유조차 없다. 백화점엔 쇼핑하러 가는 것,이라는 기본 명제를 생각할수록 난 백화점에 간 게 아니다. 그러나 아이들과 시간을 보냈다, 그 장소가 백화점이었을 뿐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백화점에 가긴 갔다.


그렇게 여행을 갔으나, 가지 않은 나는 집이 가까워지자 달리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짐을 풀자마자 달리기를 하러 나갔다. 피곤하고 지쳤는데 왜 달리기가 하고 싶을까? 나는 달리면서 그런 생각에 골똘해졌다.


지난달 어느 날에는 친구와 호수를 한 바퀴 돌았다. 10킬로쯤 걸었다. 그날도 헤어지고 돌아오면서 달리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과식을 한 날도 달리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뚜렷한 일 없이 보낸 잡스럽기만 한 날에도 나는 달리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아침에 일찍 일어나 달리기를 하겠다는 애초의 계획과 다르게, 뒤로 갈수록 저녁/밤 달리기를 한 날이 많았는데(해가 지고 난 후 산산해진 바람을 맞고 달리는 게 좋기도 했지만), 써야 마땅할 에너지가 남았을 때, 오늘 하루를 잘 살았던가 미심쩍을 때, 누구와 무엇을 했건 얼마나 열심히 살아서 피곤했건 내 핵심의 자아가, 뭔가 아쉽다고 눈을 굴릴 때 나는 달리고 싶어졌던 것이다.


달리기를 꾸준히 하면 확실히 몸도 좋아지고 건강해질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기대하며 오늘의 힘듦을 꾸준히 선택하는 것은 의외로 어렵다. 달리다 보면 땀이 날수록 잡념이 날아가고, 숨이 찰수록 공간이 생긴다. 몸이 힘들어졌다가 나아지면서 피로가 가신다. 하지만 그것을 경험으로 안다 해도 당장의 힘듦을 또 선택하는 것은 놀랍게도 귀찮다. 젋다면 젊고 늦었다면 늦은 나이에 달리기를 시작하고 익혀가면서, 할 만하다가 힘에 부쳤다가 한다. 아직도 달리기를 했다고 치는 시간과 거리의 반은 걷는데, 이런 내가 달리기에 대해 뭐라고 글을 쓴다는 게 우스울 때도 있다.


하지만 이런 모든 이상하고 묘하며 웃기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하루의 마지막에 허겁지겁 달리기를 채워넣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나를 보며 나는 인정하기로 했다. 잘 살고 싶구나. 아쉽지 않게. 남긴 것 없이.


단것과 커피가 덜 당기고, 드라마나 예능이 덜 필요하다. 무엇을 찾는지 모르고 인터넷을 떠도는 시간도 줄었다. 그런 것들은 쓸모없다고, 내 인생에서 없애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내가 고팠던 게 그게 아니라는 건 그때도 지금도 안다. 그러니까 친구의 아빠는, 티비를 본 게 아니었을 것이다.  


죽어서 이름을 남기지 않아도 좋다. 아니,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싶다. 알뜰하고 살뜰하게 '나'라고 할 만한 것은 사는 동안 다 써버리고 싶다. 그런 마음으로 하루의 마지막을 달리기로 채운다.



찰스 강가를 한 시간쯤 달리면, 마치 양동이로 물벼락을 맞은 것처럼 입고 있는 모든 것이 땀으로 흥건하게 젖어버린다. 햇볕에 탄 살갗이 따끔거린다. 머리가 멍해진다. 정리된 생각은 어느 한 가지도 할 수가 없다. 그래도 참고 끝까지 달리고 나면, 몸의 중심에서 모든 걸 깡그리 쥐어짜내 버린 것 같은, 어쩌면 모든 걸 다 털어내 버린 듯한 상쾌함이 거기에 우러난다.

/무라카미 하루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요약

달리기를 하면 온몸으로 힘들다. 그렇게 나를 소진하고 나면 덜 산 아쉬움이 덜어진다.


여행의 마무리, 달리기.


오늘도 달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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