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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도 헤도헨 Jun 17. 2024

7주. 완성형을 대하는 자세

남은 선택지는 하나.

<뛰는 사람>을 썼던 베른트 하인리히의 전작을 찾다가 어떤 블로거의 후기를 읽었다. 그도 달리기를 하면서 관련 책을 읽고 블로그에 정리를 하고 있었는데, <뛰는 사람>이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책이라고 간단히 썼다. 이유인즉슨, 너무 넘사벽 러너라 실제적으로 참고할 게 없다는 이야기였다. 게다가 이 책의 반은 생물학에 대한 내용인데, 읽어둘 만해도 재미는 없다고.


나 역시 베른트 할아버지가 뒤영벌이나 매미나방에 대해 자세히 설명할 때, 먼산을 바라보듯 책을 읽어나가긴 했다. 그래도 생물학이든 달리기든, 무언가에 홀딱 빠진 사람의 이야기, 그래서 맨 앞자리까지 간 사람의 목소리를 듣는 것 자체가 좋았다. 재미있기도 했고, 나를 타오르게 하는 땔감이 되어주었다.


그런 식으로 달리기를 잘하는 사람들이 쓴 글이나 책, 그들이 나오는 영상을 꾸준히 보았다. 처음엔 얻어걸리면 가볍게 펼쳐서 훑어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정도였다면, 갈수록 가속도 같은 것이 붙어서, 닥치는 대로 주워 모아 눈에 불을 켜고 빠져들 듯 본다.


어느덧 내 마음과 머릿속에는 달리는 사람의 모습, 달리기의 수준과 실력, 달리기에 대한 열정과 달리기로 인한 삶의 변화 등등이 상향 조정되는 정도를 넘어 거의 완성형으로 자리를 잡았다.





체중도 순조롭게 줄고, 얼굴 모습도 약간 말끔해졌다. 자기 몸이 이렇게 변화해가는 것을 느끼는 것은 좋은 일이다. 다만 젊었을 때보다는 변화에 시간이 걸린다. 젊었을 때 한 달 반이면 가능했던 일이 3개월이 걸리게 된다. 운동량과 달성된 일의 효율도 눈에 띄게 나빠진다. 그러나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체념하고 손에 넣을 수 있는 것만으로 해나갈 수밖에 없다. 그것이 인생의 원칙이며, 그 효율의 좋고 나쁨이 우리가 살아가는 가치를 결정하는 기준은 아닌 것이다.  /83쪽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나는 더 이상 젊지 않다. 지불해야 할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그에 상응하는 것밖에는 손에 넣을 수 없는 나이에 접어들고 있는 것이다.  /87쪽

ㅡ무라카미 하루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마치 내 말이 그 말이라는 듯 미소 짓다가 정신을 차린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누군가. 소설가이면서 달리기에 관한 책을 낼 만큼 유명한 러너가 아닌가? 이 글을 썼을 때 그의 나이는 나보다 열 살도 더 많은 50대 중반이었지만, 서른 즈음 달리기를 시작한 이후로 거의 매일 달리고 매년 마라톤 풀코스 경기에 나가는 진정한 러너가 아닌가?


첫 번째 글은 마라톤 풀코스를 준비하면서 날마다 기본 10킬로를 뛰는 중에 쓴 것이다. 두 번째 글은 마라톤 풀코스를 몇 킬로 남기고 완주하지 못한 지난 경기에 대해 연습 부족을 통회하며 쓴 것이다. 그러니까 나랑은 완전히 다른 처지다.


나는 런데이의 초급 훈련코스 8주도 마치지 못했다. 30-40분을 뛰면 그중 반은 걷는다(훈련이 그런 거지만). 그렇게 뛰다 걷다 하는 것도 벅차다(처음보다 나아지긴 했지만). 매일 달리지도 못한다(그랬다가 무릎 부상을 겪었다).


운동량과 경력이 으리으리한 유명하고 진정한 러너들, 그들의 이야기는 재미있고 도움이 됐다. 내 마음엔 어느새, 보고 보고 또 보다 내면화한 완성형 러너들의 모습이 언젠가 마땅한 내 모습이라는 듯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달릴 때 나는 그들과 사뭇 다르다. 한참 못 미친다. 그런 나를 마주하고 어쩐지 어색해졌다.


마치 최상류층 주인공들이 나오는 드라마를 몰입하여 보다가, 예능에 나온 톱스타의 이야기를 공감하며 듣다가 티비를 끄는 순간, 현실의 내가 오히려 어색해지는 것과 비슷하달까. 그들에게 했던 진심의 공감, 그들 덕분에 느꼈던 재미와 감동은 신기루처럼 사라진다. 현실에선 그림자초자 없어진 그들의 자리를 더듬으며, 나는 나의 현실로 돌아오지 못하고 그 앞에서 딴청을 피우고 머뭇거린다.


나는 실망과 어색함을 달래며 생각해본다. 그래, 난 아직 초보자니까. 50일밖에 안 되었잖아. 좋아, 그럼 내가 얼마큼 노력하면 언제쯤 저렇게 될까? 시작이 늦었고, 아니 그냥 늦은 게 아니라 달리기 능력치가 이미 하향세로 꺾인 다음 시작했고, 내 운동신경이나 체력이 특별히 탁월한 것도 아니고... 그런 사실들에 기죽지 않으려고 애쓰며, 계산해본다. 10월에 있을 10킬로 마라톤을 완주하려면, 6월에 6킬로를 쉬지 않고 달릴 수 있으면 될까? 그렇게 달마다 1킬로씩 거리를 늘리면.


그런데 지금 벌써 6월의 반이 지났고 나는 5킬로도 쉬면서 겨우 달린다. 현재까지 진행상황으로 보건대... 추정해보다, 과연 될까? 하는 의문이 든다.


이번 해에 10킬로 마라톤을 나가고, 내년에 하프, 그다음엔 풀코스, 그러고 나서 여러 나라로 경기 참가. 그런 식으로 로드맵을 그렸는데, 과연 될까? 의문은 짙어진다.


그렇게 냉철하고 합리적으로 계산을 마치고 나면, 발이 더 무겁게 느껴지고, 길이 더 멀게 느껴진다. 내 모습이 못나게 느껴진다. 온몸에 힘이 빠진다. 재미도 없어진다. 뭐 하는 건가 싶어진다. 지금까지 꾸었던 꿈이 바람처럼 나를 스쳐가는 것을 보면서 급기야 우울해진다.





이렇게 또 하나의 사랑이, 내 인생에 찾아온 사건이, 분명 뭔가처럼 보였는데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지나가는 것인가, 허무한 마음이었다. 씁쓸한 맛을 느끼지 않으려고 애써 남 일처럼 건너다보며 갈 거면 빨리 가버리라는 식으로 냉대하기도 했다.


런데이 코치는 분명, "여러분이 지금까지 달리고 있다면, 여러분 안에는 러너 디엔에이가 있는 것입니다!"라고 호쾌하게 외쳤는데.


나는 왜 그 말을 붙들고 싶었을까? 나에게 그런 자질이 타고났다고 하면 상황이 달라지는 것처럼.


갑자기 어떤 기억들이 욱여넣었던 짐들처럼 한꺼번에 쏟아져나왔다. 그리고 어떤 패턴으로 눈앞에 펼쳐졌다. 어른이 되어 기타와 피아노와 드럼을 배웠을 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을 때, 드라마 작가 교육원에 다녔을 때, 요가를 할 때, 그리고 또 어떤 공부들. 그 자체의 재미, 아름다움, 에너지에 빠졌다가, 기초를 익히며 달라지는 나를 보며 즐거웠다가, 완성형을 그리며 꿈을 꾸고 설렜다가... 어느 순간 그곳과 지금 이곳의 사이가 이어지는 길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 완성형은 닿을 수 없는 것, 내게 허락되지 않은 것인가 싶어진다. 그럼 급격히 흥미를 잃고는 서둘러 꾸었던 꿈을 정리한다. 가지 않을 길로.


어떤 것들은 정말 바람 같은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한가운데에서 완성형과 나를 비교하며 애쓸 때, 완성형만큼 잘 되지 않아 씨름할 때, 누군가 내게 너한테는 타고난 자질이 있다고 말해주기를, 혹은 미래의 너는 바로 그 완성형의 모습일 거라고 귀띔해주기를 그렇게 바랐었다. 그러면 한참 모자라고 도대체가 뭔가 될 리 만무한 현 상태를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처럼.


바람 같은 것은 꿈이 아니라 나였던 게 아닌가 싶다.





나오는 대로 한숨을 쉬며 달리다, 그 블로거가 지혜로웠구나 하고 생각했다. 더 잘 알기 위해서, 더 멋진 꿈을 꾸기 위해서 나는 베른트 하인리히 같은 사람의 이야기에 열심히 귀를 기울였는데... 지금 당장 2에서 3을 가야 하는 내게 9999 근처의 이야기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내 성미가 급한 게 문제인 건데, 그것은 디폴트 값인 걸. 좋아, 그건 인정하고.)


나는 아직도 달리기가 좋은데, 달리는 나를 떠나보내기 싫은데 어떻게 해야 할까? 도무지 크게 나아질 것 같지 않은 실력에 탄식하며 눈치 보듯 스스로에게 물었다. 선택지는 몇 개 없었다. 1) 완성형이 되기 위해 죽기 살기로 노력한다. 2) 깔끔하게 달리는 걸 포기한다. 3) 완성형에 신경 쓰지 않고 달린다.


1이 되면, 그러니까 그러한 노력이 가능하다는 전제 하에, 그런 결과를 결국 얻는다면, 기쁠 것이다. 그런데 해보기도 전이지만 가능성은... 크지 않다. 그렇게 되지 않는 경우, '그렇게까지 잘' 되지 않더라도 물론 노력하지 않는 것보다 나을 것이다. 그러니까 별에 가지 못해도 달에는 간다. 호랑이는 못 그려도 고양이는 그린다.


나는 지금까지 그런 마음으로 어떤 노력들을 해왔다. 그런데 문득 그런 마음가짐도, 달도 고양이도 너무 시시하게 느껴졌다. 나는 달에 가고 싶었던 게 아니다. 고양이를 원한 게 아니다. 10000을 바라며 노력했는데 100이라도 얻었다며 안위해야 하다니. 정말 만족이 될 리가 있나.


그렇다면 2. 글쎄. 언제든 택할 수 있는 옵션이므로, 일단 넣어두기로 한다.


남은 선택지는 하나. 완성형에 신경 쓰지 않고 달린다. 그러다 보면 차차 실력이 늘 테니 마음을 급하게 갖지 말자는 게 아니라, 진짜 그저 그런 수준의 러너로 언제까지나 달리는 경우. 정말 그래도 괜찮을까?


나는 곰곰이 생각해봤다. 10년 후, 20년 후에도 지금처럼 3분 달리고 2분 걸으면서 헉헉 대고, 매일 달리지도 못하고, 마라톤 경주도 언감생심이고, 내 기록에 대해서 어디 가서 꺼내지 못해도, 괜찮아?


가만히 생각했다.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런데... 괜찮았다. 그냥 괜찮았다.


엄마가 되고 싶었을 때가 떠올랐다. 아기가 잘 생기지 않았을 때, 아기가 오기를 간절히 바랐던 내 마음. 그러다 엄마가 되고 나서 좋은 엄마가 되려고 노력하다 좌절했던 때를.


글을 쓰던 순간들도 떠올랐다. 글 쓰는 게 좋아서 잘 쓰고 싶은 마음이 커지고, 작가를 업으로 삼고 싶어졌던 마음. 그게 되지 않아 좌절스러웠던 때를.


내가 되고 싶었던 것은, 내가 정말 원했던 것은 좋은 엄마가 아니라 엄마가 되는 것이었고, 유명하고 돈 잘 버는 작가가 아니라 그냥 글 쓰는 일이었던 것을. 나이 마흔이 넘어 달리기를 시작하면서 나는, 남다른 결과를 내놓고 기록을 세우는 뛰어난 러너가 되고 싶었던 게 아니다. 계속, 나이가 들어도 달리는 사람이고 싶었다.


어쩌다 나는 그렇게 완성형을 당연하다는 듯 바라게 된 거지? 내 마음이 언제 그렇게까지 달려갔지?



야망과 열정이 같은 것은 아니다. 야망은 역경에 맞서 애써 위로 올라가려는 것이다. 반대로 열정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타고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다.



베른트 하인리히 할아버지의 말이다.



내가 이렇게 해서 20년 이상 계속 달릴 수 있는 것은, 결국은 달리는 일이 성격에 맞기 때문일 것이다. 적어도 '그다지 고통스럽지는 않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좋아하는 것은 자연히 계속할 수 있고, 좋아하지 않는 것은 계속할 수 없게 되어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 옹은 말했다.


완성형 대가에게서 배울 것은 이런 깨달음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달리기를 좋아한다면 계속 달릴 것이다. 달리기에 야망을 키울 것까지 없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타고 아래로 내려가는 일이라면, 그건 너무 신나는 일 아닌가. 하마터면 내 귀한 열정을 한낱 야망으로 사그라뜨릴 뻔했다.


그러니까 언제나 그렇듯이, 중요한 것은 결국 도착할 곳이 아니라 가는 길이다. 도착지만 바라고 목을 빼고 있다면 가는 길이 즐거울 리가 있나.




요약

달리기 고수들을 보다 보면 현실의 내가 좌절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달리기는 내 수준에서도 즐거운 일.



달리는 길에 금방 떨어진 살구를 만났다. 맛났다.


무릎이 나아지고 있다. 허벅지 근육운동들, 효과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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