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릿속엔 <슬라이딩 도어즈>의 장면장면을 펼쳐놓고
이 겨울 나의 달리기는 팔 할이 지각런이다. 적절히 나가려고 했는데, 결국엔 문을 박차고 뛰쳐나가고 있다. 목적지는 요가원 혹은 성당.
일주일 두서너 번은 1.3킬로 거리의 요가원, 일주일에 한 번은 1.6킬로 거리의 성당까지 나는 멈추지 않고 달릴 수 있을 만큼의 전속력 달리기를 한다. 달릴 수밖에 없다. (이것은 불가피한 것인가, 의지인가.)
공동현관을 나서고 아파트 입구를 지나 본격 달리기의 궤도를 타면, 어김없이 어떤 기억이 눈앞에 짜잔 하고 나타난다. 거의 데자뷔 수준이다.
고등학교 때 매일 아침 이렇게 뛰었다. 그러니까 그때도 지각런이었다.
학교 정문을 7시 30분에 통과해야 했는데(지각 체크가 철저한 학교는 아니었지만, 때때로 담당 교사가 누구냐에 따라 골치 아픈 벌이 있기도 했다. 꼭 그 때문에 사생결단 달린 것은 아니다. 지각이 결단이 아닌 것처럼), 지하철 통으로만 25분이 걸렸다. 우리 집에서 지하철 역까지 걸어서 대략 10분(아아 그리운 역세권..), 다시 지하철 역에서 학교까지 대충 10분이 걸렸다. (지하철 출입구와 플랫폼 사이의 거리 별도)
집에서 6시 반쯤 나와 6:48 지하철을 타서 우아하게 걸어다닐 계획이었지만, 나는 아침을 서두르는 보통의 사람처럼 움직일 수 있는 6:51이나 6:54을 흘려보내고, 어쩌자고 6:56도 떠나보내고, 거의 언제나 6:58 혹은 7:01 차를 탔다.
치마 교복을 입고 가방을 멘 채로 우다다다 뛰었다. 오르막길을, 계단을, 골목길을, 역사를. 지나가는 사람이나 주위의 사물이 배경처럼 뒷짐지면, 등 뒤의 가방을 달가당대고 치맛자락을 펄럭이면서 피맛으로 헉헉거리며 다리를 굴렸다. 머릿속엔 <슬라이딩 도어즈>의 장면장면을 펼쳐놓고, 내가 이 차를 타느냐 마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질 것처럼, 달라질 모양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그닥 개의하지도 않으면서, 고등학교 3년 동안의 팔 할을 그렇게 다녔다.
딸 셋 중 하나였는데 딸 셋을 가진 자가 되어, ‘스무 살까지만 살고 싶어요’라는 문장에 영화 주인공처럼 막연해지던 내가 마흔 중반으로 멋쩍게 끌려가면서, 입은
옷도 다르고 발 닿는 길도 다른데, 머릿속의 기네스 팰트로와 목구멍의 피맛이며 뛰어다니는 내 처지는 어쩜 이리도 같은 걸까 의뭉스럽게 의문을 품는 것이다.
몸이 너끈히 데워져서 이 날씨에 요가원 문을 열어젖히자마자 민소매 차림으로도 핫요가 한중간의 경지다. 성당에선 나 혼자 외투 없이도 미사가 끝날 때까지 아늑하다. (그 시절에도 아마 졸음을 날려버리고 신진대사의 불을 화륵 켜놓아서 학업이며 학교생활에 이롭기도 했을지도 모르지 않을까?)
그러니 아무래도 이 할쯤은 부끄러운데, 25년여 전의 그때나 지금이나, 어쩐지 괜찮은 것도 같고 지겹지가 않아서 은근히 웃겨 죽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