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이 영화는, <록키> 같은 영화가 아니었던 것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힐러리 스웽크의 영화, <밀리언 달러 베이비>를 두 번째 봤다.
가진 것 없는 여자의 록키풍 성공 서사, 강렬하고 호쾌한 권투 시합 장면, 성공의 정점에서 당한 충격적인 사고.
2005년 개봉했을 때 보고 지금 내가 기억하는 것은 이 정도였다.
(다시 보니, 모건 프리먼도 나오네?)
재미가 있었던가, 없었던가? 아마 괜찮았던 것 같다,
동림옹의 영화이니, 웰메이드 영화겠지,
이런 생각으로 12세 첫째와 볼 영화로 골랐다.
요즘 수요일에 하교 후 바로 집에 오는 첫째와 둘만의 시간이 두 시간쯤 생겼다.
같은 영화는 웬만해선 두 번 보지 않는데,
2/3 지점에서 일어난 엄청난 반전 후, 이야기가 어떻게 됐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고,
갑자기 너무나 궁금해졌다.
권투 영화니까 지난번 본 <코다>보다는 덜 지루할 거라고 꼬드겨 영화 재생.
(나는 <코다> 매우 좋았다. 딸은 좋았지만 지루했다고 했다.)
아이가 좀이 쑤셔서 신음소리를 내는 동안, 나는 '이렇게 깔아놓은 이야기가 많았었구나' 생각했다.
느리게 차근차근 쌓아가면서 중의적이고 상징적인 말과 상황으로 조금씩 알아채게 하는 방식에 나는 빠져들었고, 아이는 "도대체 언제 재밌어지냐?"고 점점 더 자주 물었다.
'조금 있으면 완전 반전이 일어나는데, 거기까지 봤는데 재미없으면 끈다'고 타협을 했다.
(그런 사건이 일어나는데, 뒤가 안 궁금할 리는 없겠지..)
그런데 그런 일이 일어났다. 매기(힐러리 스웽크)가 상대의 반칙 펀치를 맞고 쓰러지며 의자에 목을 부딪혔고, 경추가 산산조각이 났다. 그리고 평생 머리 아래로는 움직일 수 없는 상태라며 호흡기 등을 달고 병실에 누워 있는데...
"이제 그만 봐도 되지? 내가 보고 싶은 거 봐도 되지?"라고 첫째가 물었다.
이야... 어떻게 여기서 멈출 수가 있을까? 야속해하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 어제 혼자서 다시 봤다. 나는 아직도 35분이나 남은 뒷 이야기가 너무 궁금했다.
이 영화는 그러니까 <록키> 같은 영화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 상황에서 35분이나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지?
남은 이야기는 내 기억에서 전혀 없던 이야기다.
그렇게 깡그리 잊을 수 있는 이유가 궁금하지만, 그래서 지금 다시 볼 수 있었다는 데 감사하기도 하다.
<미 비포 유>나 <아무르>처럼, 신체의 문제로 더 이상 자기답게 살 수 없을 때 삶을 마무리하는 영화이기도 하고,
(어디까지나 주인공은 힐러리 스웽크가 아니라 클린트 이스트우드니까) 그런 사람을 보고 자신이 죄책감에 시달릴 줄 알면서 어떤 선택을 한다는 점에서 <죽여주는 여자>가 생각나기도 했다.
어쨌거나, 자꾸만 몸의 한계와 죽음의 문제를 생각하게 되는 요즘, 쉽게 결론 내릴 수 없는 존엄사(혹은 조력자살)에 대해 한쪽에 얹을 추가 되어주었다는 점에서 반갑기도 하고 더 무거워지기도 하는, 그런 이야기였다.
어려움이 있었지만 끝까지 최선을 다했던 사람이, 바닥도 쳐봤고 꼭대기에도 앉아본 사람이, 내 삶은 이걸로 충분하다고, 내 삶을 의미 있게 만들어주는 기억이 희미해지지 않게 여기서 끝내고 싶다고 말할 때, 나는 깊이 동의가 되었다.
하지만,
서른한 살에 권투를 제대로 시작해서 불굴의 의지로 최고까지 가는 매기,
혹은 불우한 상황에서 꿈을 붙들고 살아가면서도 선한 인간성을 잃지 않은 매기,
냉소와 조소로 일관하지만 자신의 사람들을 아끼고 끝까지 책임지는 인간적인 프랭키,
신부와 욕 먹으면서 싸우지만, 죄책감 때문에 23년 동안 매주 성당에 가서 진심으로 기도하는 프랭키,
누가 봐도 비참한 처지지만, 자신은 최선을 다했었다는 은근한 자부심과 유머, 다정함을 잃지 않고 사는 에디,
곰곰 생각하게 하는 이들 캐릭터와 이들이 만들어내는 드라마보다
내 가슴에 남는 인물과 장면은 따로 있었다.
기다림 끝에 임신, 그리고 유산 후에 얻은 소중한 아기를 유모차에 태우고 산책을 하던 어느 날,
익숙하면서도 여전히 움츠리게 만드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았다.
초등학교 고학년쯤 되어 보이는 아들에게 새된 목소리로 타박하는 엄마.
그녀의 찡그린 얼굴과 거친 손짓, 아들의 쪽팔리고 멋쩍고 싫은 내색.
고개를 돌렸다.
뭐랄까..
순간적으로 못 볼 걸 봤다는 느낌이 들었다.
굉장히 사적인 장면, 그러면서도 신기하고 처음 보는 게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낯익은 상황.
나도 다 알고 있는, 나도 겪었던 일들.
그렇지만, 내 아이에겐 절대로 돌려주지 않겠어!
굳센 다짐 같은 것이 쑤욱 올라왔지만, 본능처럼 알아차렸다.
내게도 언젠가 닥칠 미래라는 것을.
나도 그랬듯이. 너도 그랬듯이. 우리 모두 겪었듯이.
저 엄마는 처음부터 그랬을까? 아니었을 것이다.
지금 내가 내 아이에게 털 끝 하나 잘못 건드릴까 조심하는 것처럼,
말 한 마디와 눈빛에도 애써 애정과 진심을 듬뿍 담는 것처럼(그래서 오히려 가장한 것처럼 들릴 정도로),
저 엄마라고 이런 시기가 없었을까. 자기 아기가 소중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결론적으로
나도 저렇게 될 것인데,
그 사이엔... 도대체 무엇이, 무슨 일이 있는 걸까.
결국 알게 될 답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이미 공포에 사로잡히듯이,
나는 이미 끔찍하고 두려웠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욱 그러지 않겠다고 다짐을 세워보았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 기억이 흐릿해진 만큼, 그 답을 내 눈앞에서 보고 있다.
남이 남긴 음식을 몰래 먹으며 식당에서 번 돈으로,
눈두덩이 멍들고 코뼈가 부러지며 얻어터져서 번 돈으로
매기는 엄마에게 집을 사준다.
하지만 엄마는 좋아하기는커녕, 감사하기는 개뿔,
집이 생기면 보조금을 못 받는다고, 현금으로 줬어야 했다고 타박한다.
뿌듯함과 생기가 새어나가는 얼굴로 자신의 경기는 봤느냐 묻는 딸에게,
여자가 무슨 권투냐고 애나 낳으라고 비웃는다.
딸이 평생 불구가 되는 사고를 당했는데도,
엄마는 바로 오지 않는다. 그 지역에 와놓고도 일주일이 지나서 병원에 온다.
디즈니랜드에서 놀고 온 옷차림 그대로.
와서도 딸을 위로해주거나 같이 슬퍼해주는 대신,
앞으로 생사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매기의 재산을 자신에게 안전하게 돌리기 위한 서류를 내민다.
매기가 손을 쓸 수 없으니 볼펜을 입에 물리라는 다른 딸의 말대로 볼펜을 입에 물려 사인을 종용한다.
그 장면은... 정말 끔찍했다.
입에 물려진 볼펜을 뱉어버리자 의아해하는 엄마에게,
매기는 눈물이 차오른 눈으로 묻는다.
"What happened to you...?"
왜 이렇게 된 거예요?
그 엄마는 정말 못되고 나쁜 엄마였는데, 왜 그렇게 됐는지 제대로 나오지도 않았는데,
영화를 받아들이는 데 전혀 무리가 없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으니까, 저런 엄마도 있다는 걸.
'엄마'는 빌런으로서 전사(前史)를 설명하지 않아도 핍진성의 문제가 없는 존재다.
그 전사는 우리 삶에 충분하게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알기도 하고 모르기도 한다.
매기의 엄마도 처음부터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매기는 그때의 엄마를 안다. 지금의 엄마를 본다. 그 사이는 모른다. 그 간극을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니까 묻는다. 어떻게 된 거냐고. 왜 이렇게 됐냐고.
어젯밤에 첫째 아이를 혼냈다.
단호하고 따끔하게 혼내고 나서는 거의 후유증이 없다.
하지만 난 비이성적이었고, 아이를 비인격적으로 대했다.
<D.P 2>에서 손석구가 섬처럼 외딴 병영에 가서 순식간에 흑화하듯이,
타인은 손댈 수 없는 공간, 손바닥만 한 세계에서 최강자가 되는 순간,
인간은, 아니 나는 갑자기 이해할 수 없는, 그러나 이상할 것 없는 악당이 된다.
그런 날들의 반복, 호락호락하지 않은 삶의 숙제들.
그 무엇을 이유로 댈 수 있을까?
나는 왜 이렇게 됐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