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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랑> : 생긴 대로 끝까지 사는 삶

‘생긴 대로’의 차이가 산과 들과 바다의 차이 정도라면

by 모도 헤도헨



누군가 이 영화를 추천했을 때 보겠다고 적어두고, 기억에 남긴 거라곤 에단 호크가 나온다는 것과 볼 만한 영화로 언급되었다는 사실뿐이었다.

영화를 고를 때마다 찜한 영화라고 뜨는데, 에단 호크에 별다른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고, 볼 만한 영화야 널렸고, 무엇보다 뭔가 우중충하고 질척일 것 같은 소개화면과 소개글에(제목도 한 몫..) 전혀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그러다 최근에 또 누가 이 영화를 언급했고, 궁금해져서 봤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인생 영화 10편에 올려 놓아야겠다.


보는 동안 울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오열한 것도 아니고, 눈물 콧물이 줄줄 흘러서 영화보다 ‘울고 있는 나’에 정신이 팔린 것도 아니었다. 언제부터 울기 시작했는지, 울고 있는지도 모르게 내내 눈물이 나왔다. 내 기억에 이랬던 영화로는 10여 년 전 봤던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뿐이다. 그때는 인생의 비참과 어둠에 어쩔 줄 몰랐다면, 이번엔 희망과 안심의 기운이었다는 게 다르다.


나는 가능한 아무 정보 없이 영화를 보는데, 보는 중에 그런 생각을 했다. ‘이런 이야기를 인간이 만들 수 있을까? 설마, 이건 실화일 거야.’ 이야기의 완성을 위한 일화가 아니라, 이런 일이 있었다고 보여주는 일화임이 분명했다. 마지막 장면을 보니 역시 실화였다.

물론 각색의 과정이야 거쳤겠지만, 넣고 빼고 과장했을 수 있겠지만, 이 영화는 사람들이 보고 싶고 믿고 싶은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아름답고 감동적으로 잘 짜놓은 가짜이기보다, 실제로 마주치기 어려운, 믿기 힘든 진짜를 잘 전달하려고 애썼다고 느껴졌다.


그리고 내가 받아들인 그 ‘진짜’는, 생긴 대로 끝까지 살고도 사랑받고 인정받고 끝내 행복해진 사람의 이야기다. 이 영화는 그에게 보내는 존경과 감사를 담은 추모이고.


사람이 생긴 대로 산다고 할 때, ‘생긴 대로’의 차이가 산과 들과 바다의 차이 정도라면, 그렇게 사느냐 살지 못하느냐의 스펙트럼은 화성과 지구와 목성의 차이쯤 아닐까? 생긴 대로 살아도 괜찮을 것 같은 사람이 있고, 더 어려울 것 같은 사람이 있을 것이다(<내 사랑>의 모드는 분명 후자). 그런데 생긴 대로가 싫어서든, 자신이 없어서든, 자꾸만 실패해서든, 남들, 바깥, 세상의 기준에 맞추고 기대에 부응하려고 애쓰느냐(마츠코) 반대로 자신이 가진 것을 돌보고 갈고 닦으며 끝까지 살아내느냐(모드)는 전술한 차이를 훌쩍 뛰어넘는 차원이다.


모드는 날 때부터 그랬는지, 어떤 병 때문인지, 몸이 예쁘지 않게 뒤틀려 있다. 그래서 움직임이나 걸음새가 이상하고, 아프다. 단지 그게 다른데, 가족들은 그를 자기 앞가림 못하는 사람으로 여기고 짐짝처럼 대한다. 지나가면 뭇사람들이 돌을 던진다거나 무시하는 것도 예사고. 그런 가족들에게서 벗어나려고 에버렛의 집에 입주 가정부로 들어가는데, 모드를 처음 본 에버렛 역시 그를 부족하고 못난 사람으로 여기고 (에버렛의 사람됨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함부로 대한다.

그렇게 세상이 자신에게 아무런 호의를 보이지 않고, 가진 것도 물론 아무것도 없으며, 자기 마음대로 되는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하나 없을 때, 모드는 어떻게 하는가? 어떻게 반응하고, 어떻게 버티고, 어떻게 나아가는가?


오빠가 모드와 상의 없이 부모랑 살던 집을 팔아버리고, 모드를 숙모네 집에 떠넘기다시피 했을 때, 그리고 숙모는 매사 모드를 못마땅하게 여길 때, 자기연민에 빠지거나 화를 내거나 비뚤어지거나 하는 대신, 모드는 자기가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고 집을 나갈 수 있는 길을 찾는다.

에버렛이 모드를 보자마자 “난 여자를 구한다고 했는데.”라고 말하자 화를 내며 따지거나 문을 쾅 닫고 나오거나 기죽는 대신, 모드는 미소를 띠며 말한다. “제가 뭐로 보이나요?”

모드가 에버렛의 친구와 담소를 나누다 ‘집이 좁지 않고 둘이 살기에 아늑하다’는 농담을 했다고 에버렛이 뺨을 후려쳤을 때, 명백한 모욕에 복수(를 다짐)하거나 신세 한탄을 하는 대신, 모드는 뺨을 부여잡고 집 안으로 들어와 눈물을 닦으며 벽에다 그림을 그린다.

자신에게 돌을 던지는 아이들을 두고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라고 말하고, ‘네가 공주인 줄 아냐’면서 자기 옆에서 그냥 자라는 에버렛에게 “저는 털털해서 괜찮아요.”라고 말하고, 에버렛이 “이 집의 서열은 나, 개, 닭, 그리고 너”라고 말할 때 노발대발하지 않는다.

숙모에게 쫓겨나면서 “나도 할 수 있어요.”라고 말하고, 정말 고생해도 끝까지 자기 일을 해낸다. 첫 만남부터 자신을 무시하고 하대하는 에버렛에게 “숙식만 제공된다고 했지만, 급료도 받고 싶어요.”라고 말하고 결국 돈을 받아낸다. 무식하고 완고한 에버렛이 모드의 도움을 받으면서도 “사장은 나야.”라며 얼굴을 붉힐 때, 나서지 않고 도우면서 “에버렛이 사장님이라서요.”라고 말한다.

모드의 존재감과 영향력은 점점 커져간다. 모드가 그린 그림의 가치를 알아본 산드라가 그림을 사겠다고 와서 에버렛이 가격을 제시하고 팔려고 할 때, 정말 싫었으면서도 그냥 싫다고 말한다. (물론 에버렛의 사람됨 때문이기도 하지만) 에버렛은 곧바로 모드의 의견을 존중하며 번복한다. 서열이 점점 뒤바뀐다. 모드를 대하는 에버렛의 마음도, 자세도 달라진다.


생긴 대로 사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내 마음대로 되지 않음에 짜증 내느라, 나를 대하는 타인의 태도에 불쾌감을 느끼느라, 나를 알아주지 않는 세상에 열 받고 인생과 운명의 무의미에 좌절하느라 얼마나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는가? 그 모든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혹은 나를 괴롭히지 않거나 별거 아닌 것처럼 위장할 필요는 없다. 다만 정말 내 의지와 필요와 욕망을 알아내고 표현하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서, 모두의 관심과 지지를 받아야 하거나 말과 태도를 과격하고 강렬하게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약자일 땐 침묵하거나 떼를 쓰고, 강자가 되면 폭력을 쓰거나 조종한다. 어쨌든 모두, 내가 원하는 대로 되게 하기 위해 나 외의 것을 바꾸려는 짓이다.) 내가 가진 보잘것없는 힘과 에너지를 화살로 만들어 바깥을 향해 혹은 나를 향해 쏘아댈 필요도 없다.

그럼 어떻게 하라고? 그냥 눈물을 닦고, 심호흡을 하고, 나를 다독이며,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해나갈 뿐이라고 모드는 보여준다.


그렇게 하면, 결국 모드처럼 자기를 함부로 대한 사람에게 사과를 받고,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고, 세상의 인정을 받고, 행복하게 삶을 마감하는가? 그러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문제는, 그 답은 모른다는 것이다. 모른다. 보장되지 않았다. 어찌 보면, 모드는 운이 좋았다. 운명이 그에게 여러 가지로 박했지만, 그런 운(혹은 그런 운을 자기 것으로 거머쥘 만한 저력)은 주어졌던 것일지도.

하지만, 파스칼처럼 네 가지 경우의 수를 살펴보고 내기를 걸어본다고 해보자. 생긴 대로 살다가 잘 되는 경우(모드), 생긴 대로 살다가 잘 안 되는 경우, 생긴 대로 안 살고 세상에 맞추었다가 잘 되는 경우, 생긴 대로 안 살고 세상에 맞추었다가 잘 안 되는 경우(마츠코). 나로선 혹시 운이 안 좋아 두 번째 경우로 삶을 마치더라도, 생긴 대로 살기로 하는 게 현명한 선택으로 보인다.




이 영화의 한글 제목, ‘내 사랑’에 아쉬움을 표하는 사람이 많은 걸로 안다. 성의 없는 제목 같기도 하고, 그다지 구미가 당기는 제목도 아니고, 무엇보다 모드의 삶보다 모드와 에버렛의 관계에 집중하게 하니까. (참고로 원제는 ‘Maudie’)


나 역시 처음 영화를 볼 때는 에버렛과 모드가 사랑하는 사이로 나아가는 과정에 주목했다. (그것은 물론 제목 탓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에버렛을 연기한 에단 호크의 존재감과 호연 때문이다. 누군가의 연기에 이토록 감탄한 것이 언제였던가 싶다. 스크린 밖의 에단 호크에 관해 1도 모르면서 영화 <비포>시리즈나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에서 그가 연기한 인물들이 그냥 본인의 모습이겠거니 했다. 그런데, 우와, 이번 영화에서는 완전히 다른 존재로 보이는 것이었다.) 그 과정 역시 충분히 감동적이다. 우리가 보고 들은, 혹은 알거나 경험한 거의 대부분의 사랑 이야기는 빙산의 일각을 보고 빠져드는 데까지의 이야기다. 그리고 그 후의 이야기가 보태진다면, 그것은 그 밑에 숨겨진 거대한 얼음들 때문에, 아니면 애초 얼음인지조차 몰랐던 것 때문에 실망하고 오해하고 질리고 억울하고 원망스럽고 체념하는 이야기다. <오만과 편견>류의 ‘처음엔 오해했지만 사랑하게 된’이야기도 있지만, 평생에 걸쳐 한 사람이 정말 어떤 사람인지 알면 알수록 더 사랑하게 되는 이야기는 없는 것 같다.


그런데 <내 사랑>은 그렇다. 모드와 에버렛의 관계는 서로 완전히 모를 때 제일 사랑에서 멀었다가, 알아갈수록 더욱 사랑에 가까워진다. 잠깐이 아니고 평생 그렇게 이어지다가, 가장 사랑할 때 모드가 죽는다. 마지막 순간에 에버렛은 ‘나는 왜 당신이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까?’라고 말하고, 모드는 ‘나는 사랑 받았어.’라고 말한다. 그러니 사랑 이야기로 이 영화를 소개한 것도 납득할 수 있고, 이런 사랑의 관계를 본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동적이었기에, 나는 제목을 바꾼 것을 (내 맘대로) 용서한다.


하지만 이 특별한 사랑 역시, 모드가 그 자신으로 살았기에 가능한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감동적인 것이라고 못박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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