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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숙녀 Jan 31. 2024

숙녀의 버킷리스트. 정신과에 가다 2


멍 때리기 대회란 게 있다.


뉴스에처음 보곤, 하다 하다 별 요상한 대회를 다 하는구먼 했는데. 역시 사람도 인생도 속단은 금물이란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요상한 타이틀을 겨루는 자리가 작금의 내겐 마치 유토피아, 우승자는 꼭 뮤즈처럼 와닿을 줄 그 누가 알았겠는가.


언제고 듣기를, 인간은 죽을 때까지 뇌의 3% 정도밖에 쓰지 못한다던데. 그게 사실 나는 대체 어쩌자고 2% 정도를 온갖 짐작과 해석 같이 하등 생산성 없는 영역에 쓰고 있는 것일까. 모르는 새 심리학  박사 학위라도 건가. 아님 사회학자? 철학?


놉! 그저 그 달 벌어 그 달 사는 월급쟁이. 고로 이건 안 봐도 비디오인 게, 생각하는 거야 돈 안 드니까 밤낮없이 허고 또 허고 해재꼈다는 결론 밖엔 없음이다. 질러놓은 카드값이 삶의 원동력 월급쟁이에게 1인분 이상의 사색은 독인지도 모르고 묻고 따블로 가버린 것.


그러고 보면 사색인지 생각인지 하는 걔도  비겁하다. 누울 자릴 보고 발을 뻗어야지. 어쩌자고 매일 존버하 한 뼘여유 없는 ''들의 머릿속에만 열나게 는지. 강약약강. 아무래도 내가 제일 싫어하는 부류에 틀없다.


.....라곤 하지만 인간세상의 생태계가 그렇다면, 어느 정 을 빼고 받아이는 것 또한 현대인의 자세이자 매너.




인정이 빠른 편인 나는,


고로, 한쪽에선 멍 때리기 대회 발상을 반대로 하는 대회도 개최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기에 이른다.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에서 심신을 쉬어가는 게 중요한 만큼, 그러지 못해 여전히 고통인 이들의 이야기중요하는 이유에서다.


'멍 안(못) 때리기' 대회 같이, 뇌를 1초도 쉬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배틀을 마련해 주신다면, 나를 비롯한 나의 동지 누군가는 그 타이틀로나마 본인의 정서적 고단함을 세상 어디에서든 어필할 수 있을 텐데.




과연 번아웃이 될까 넌 아웃이 될까.


설문을 작성하려 자리에 앉았다. 이름을 쓰고, 내원일을 쓰고 마치 설문 표지를 넘기는 일이 꼭 인생을 건 대단한 시험지의 첫 장을 여는 것처럼, 진지하다 못해 엄숙했다. 그리곤 표지를 넘기자마자 터지는 실소.


?? 아니 마음과 설문지 첫 장 맨 꼭대기에 왜 우리 회사 약자가 쓰여있지? 몰래카메라 리는 없고 일종의 퀘스 같은 건가.


'이런 자극쯤는 조금의 동요도 없어야 하는 것이 마음 건강의 첫 관문입니다. 나숙녀 님,  회사 이름쯤은 무덤덤히 무시하며 설문을 완료하세요' 하는?


그러니까 게 무슨 그림이냐면, 그것은 우리 회사명이 '홍길동', 영문명은 'Hong Gil Dong'라고 했을 때, 설문지 첫 장 위에 본문의 크기로, 볼드처리 빡! 해서는


H.G.D


라고 쓰여 있는 황당한 장면이 연출된 것이었다. 홍길동 때문에(정확히는 안의 특정 족속들) 때문에 가진 고민 끝에 온 곳에서, 홍길동 이름을 마주하다니.


어이가 없어 대체 우리 회사 약자가 여기서 왜 등장하는찾아보니, 그 말 뜻이 뭐 불안척도 평가 시기라나?




상당히 거시기한 기분으로 시작한 설문은, 내가 그간 MBTI를 비롯하여 해온 그것들과는 다르게 나라는 인간, 내 인생을 총칭하여 작성하는 것이 아니라 최근 1개월~3개월 내의 경험과 생각만을 바탕으로 체크하도록 돼있었다.


쉽겠다 싶었지 더 애를 먹었으니. 과장 조금 보태어 당장 어제 먹은 저녁도, 어제 입은 옷도 기억이 안 날 때가 많은 마당에 최근 3개월이라... 더욱이 날 괴롭힌 인물과 그로 인한 데이터들은 곱씹어질 대로 곱씹어져 이게 최근의 일인지, 아주 오래 묵혀온 일인지 분간도 어려운 .


결국 심사에 숙고까지 거듭하며 임한 결과, 열 장 정도의 설문에 걸린 시간은 무려 30분 남. 훌러덩훌러덩 넘길 거라 여긴 내 발목을 잡은 것은 보기 간 경중의 차이였다. 대체 그렇다와 약간 그렇다, 매우 그렇다의 기준이 무엇인지 나만 모르는 거냐고.


이를테면 오늘 마음과에서 설문의 경우, 몇 가지 문항을 빼곤 죄다 '매우 그렇다'인 것만 같은데, 내 상태가 그렇게나 극한으로 내몰려진 것은 아니라는 걸 나도 알 것 같 고민이었다. 문항마다 인정, 약간의 인정, 매우 강한 인정 사이에 친절한 가이드라인이 있다면 참 좋을 것을. 타인이든 본인이든 사람을 객관화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구나. 이럴 때 챗GPT는 무어라 할까.




- 설문하신 걸 보니, 많이 힘드신가 보네요. 우울도 수치가 너무 높고, 강박도 있으신 거 같고. 조금 더 심해지면 공황도 올 수 있는 그런 정도예요. 자신에 대한 동정이나 연민 이런 것도 잘 안 보이고. 내가 잘못해서 벌을 받는다 이렇게 생각하시네요. 불안도 굉장히 높고. 언제부터 이러셨어요?


"이 회사 오고 나서요. 회사 탓을 하는 건 아니고, 회사가 문제도 아닌데 일단 이 회사 들어오고 나서는 계속 그 기미는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다 4년 전쯤부터 좀 많이 심리적으로 위축되고 불안했고, 그래도 마음과는 정말 꿈에도 생각 안 했는데, 이번 여름에 좀 일이 있고 나선 일상이 제대로 굴러가질 않아서. 저 좀 편해지고 싶어 왔어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실래요? 일? 사람? 아니면 힘든 뭐 다른 게 있을까요?


"사람이요. 회사도 좋고 일도 그래요. 물론 회사에 괜찮으신 분들도 많은데, 제 가까이에 너무 힘든 사람이 있는데 이제 제가 한계인 것 같은..."


-번아웃은 확실히 아니네요. 그런 종류는 아닌 거 같고. 사람이 힘들다라... 어떤 일일까요?"


원래도 좀 낯을 가리는 편. 하다 하다 병원에서도 낯을 가리는 나는, 본래도 진료를 보러 갈 때면 증상에 대해 혼자 열심히도 축약해 말하곤 했다. 내 입장에서야 병원에 올 만큼 날 힘들게 하는 증상들이라지만, 어차피 아무리 장황히, 소상하게 늘어나봤자 감기, 몸살과 같이, 꼭 '재채기'처럼 짧고 가는 질병으로 정리되기 일쑤라는 학습의 결과였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껏은 중요하지 않았다. 백 년 천년을 그래 왔다 하더라도 여기선 달라야 했다. 무슨 말을 하더라도 우울증 류의 질환들로 퉁- 쳐질 확률이 높다지만 그 퉁이 뭘로 쳐지는지 나는 반드시 알아야 했다.


"아... 일들을 제가 다 말하기는 어렵고...  일단 여름에 어떤 일이었냐면"


신기한 일이었다. 원장석 앞에 놓인, 빳빳히 날 선 모서리사각형이 눈에 띈 것도 순간. 이내 내 손에 들려있었다.


티슈가 셀프서비스였던 탓에 원장님은 금요일 아침부터 웬 여환자의 눈물바람을 정통으로 맞아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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