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마음을 주는 데도 용량 제한이 있어요
띵-
밤 열 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 갑자기 울린 알람음에 심장이 뛴다. 이 시간에 연락할 사람은 뻔한데.
-나 진짜 이혼하고 싶어.
이럴 줄 알았지. 늘 나에게 넋두리를 하는 친구의 연락이다.
-왜 또 무슨 일인데.
사실 이쯤 되면 궁금하지도 않다. 친구가 늘 이혼을 입에 올리는 일은 흔하니까. 뭐 또 남편이 술 마시고 늦게 들어왔거나, 시댁 식구들이 말도 안 되는 것들로 꼬투리를 잡았거나, 그냥 갑자기 불현듯 찾아오는 우울함 같은 게 이유겠거니.
-지금 통화 돼?
나는 말하기를 꽤 좋아하는 사람이라 전화에는 아무런 악감정이 없음을 미리 밝히는 바이다.
하지만 밤 열 시가 넘어 지금 통화 돼?를 묻는 카톡에는 나도 모르게 머뭇거리게 된다.
'이거 지금 시작하면 열한 시는 넘어야 할 텐데. 내일 아침에 운동 가려면 여섯 시 반에는 일어나고...'
전화는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부터 확 숨이 막히는 기분이다.
와중에 성의 있게 들어줘야 할 테니 당도 떨어지는 것 같고.
주섬주섬 적당히 소리가 안 나면서 먹을 수 있는 간식들을 챙겨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는다.
(초콜릿, 사탕 류를 추천한다. 견과류는 지난번에 시도했다가 지금 뭐 먹어? 하며 들킨 적이 있다.)
-응 전화해
와중에 절대 내가 걸진 않는다. 전화를 받아 주는 것도 힘든데, 통화 비용까지 내가 부담하는 건 억울할 것까진 아니어도 유쾌하진 않으니까. 그리고 나는 알뜰폰 요금제라 한 달에 100분 밖에 통화를 못 한다.
오늘 이 넋두리로 70분을 써 버리면 나의 남은 한 달은 어떻게 지내란 말이야.
기다렸다는 듯 울리는 전화에 에어팟을 끼고 심호흡을 한 번 한 뒤 전화를 받는다.
"내가 이상해?"
"아니 안 이상해. 당연하지 내가 너였어도..."
이제 이런 통화는 전문가가 다 됐다.
꼭 이런 일이 생기면 너희는 자기가 이상한 지, 과민한 지, 예민한 지 묻더라. 그렇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는데.
상대방은 달라져도 이런 대화의 패턴은 늘 같다. 이 친구는 절대 남편과 이혼하지 않을 것이고. 다른 친구는 절대 퇴사하지 않을 것이며. 또 다른 친구는 그 남자에게 오늘도 '내가 더 잘할게'를 보내겠지.
전화기 넘어 끊임없이 자기 얘기를 쏟아내는 친구를 뒤로 하고 나는 모니터 너머 시계를 보며 앞으로 몇 시간이나 잘 수 있는지 계산하기 시작한다.
'흠... 여섯 시간? 조금 애매한데 이제 슬슬 끊어야겠다.'
"어어 근데 나 내일 출근..."
"아 미안해 내일 목요일이지. 얼른 자 시간 내줘서 고마워."
"아냐 아냐 다음에 얼굴 보고 더 얘기하자. 너무 속상해하지 말고. 너도 푹 자."
"응 고마워. 카톡 할게!"
한결 후련해진 친구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는 순간. 과제 하나를 끝낸 기분이 든다.
에어팟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옛날 같았으면 오른쪽 얼굴이 반쯤 익어가는 기분을 느끼며 뜨끈해진 핸드폰을 쥐고 있어야 했으니까.
나도 처음부터 이런 사람이었던 건 아니다. 나는 사람을 좋아하고, 특히 '내 사람'에 대한 관심은 애정을 넘어 집착에 가까울 정도였으니까. 근데 어느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매번 이렇게 비슷한 문제로 나에게 연락하는 이유가 뭘까? 내가 애를 써서 해결책을 제시하고, 공감하고, 같이 아파해도 결국 또 똑같은 문제로 나를 찾는데.
웃기게도 남들이 가져온 문제에 가장 많이 아파하고 고민하고 있는 게 나였다. 문제를 가져온 사람은 고해성사라도 한 양 나와 전화한 뒤 푹 잠들 수 있지만, 나는 그 고민을 듣고 해결책을 찾느라 오히려 잠을 못 자는 일이 몇 번 반복되면서 깨달았다.
'아! 나한테 바라는 게 해결책이 아니구나!'
유레카를 외치며 뛰쳐나간 아르키메데스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이 엄청난 깨달음 후 나는 이제 친구들의 고민이나 걱정에 한 발짝 떨어져 있을 수 있게 됐다. 그리고 우습게도 내 열과 성을 다해 고민 상담을 해 주던 때보다 더 많은 전화를 받게 됐다. 친구들이 원하던 건 해결책이 아니라 적당한 맞장구와 공감이었다.
여전히 밤늦게 날아오는 카톡과 전화에 버거움을 느끼기도 하는 나지만 그래도 이젠 어느 정도 마음을 덜 쓰는 방법을 배웠다. 적당히 요령 있게 넘기는 법도 알아가는 중이다.
그렇지만 얘들아 우리 열 시 넘어서는 자제 하도록 할까? 회사에서 하루치 마음을 다 쓰는 날도 있단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