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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붉은낙타 Dec 17. 2021

사랑 고백을 빙자한 자랑



“지금까지도 여러분은 잘 해오셨습니다아~. 용기를 가지고 끝까지! 완주해봅시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두 다리로 여기까지 오셨습니다. 여러분은 정말 위대한 여정을 시작하셨습니다.”

“여러분 자신을 믿으세요! 한발 더 나아갈 수 있습니다!”

"좋습니다! 이대로 계속 달려보는 겁니다!“

“포기하지 마세요! 끝까지 달리세요!”


가만히 앉아 글로 받아써보니 더 허무맹랑하다. 하하하. 내가 이런 말에 힘을 얻을 줄이야. 사실 최근 몇 년, 아니 훨신 더 오래 전부터 나는 내 곁의 사람보다는 기계의 말이나 나와 아무관계없는 가수의 노래, 드라마의 배우를 보며 더 힘을 받고 있었다. 사람이란 족속들은 원래 그랬는지 모른다. 관계하고 있는 세계에서 너덜해져버린 몸뚱아리는 전혀 모르는 타인을 통해서만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 말이다. 사기같은 말이지만 다들 알면서 모른 척 한건가? 아니면 진실은 혼자만 알고 있었던 건가? 여하튼, 나의 최근 시간들이 그러했다.


처음 Run Day 어플을 추천받았을 때 트레이너 음성을 설정할 수 있다는 팁을 얻었다. 주절주절 말을 끝임없이 해대는 트레이너의 음성을 구간 및 시간안내 음성, 가이드 음성, 격려 음성, 페이스 피드백 음성, 명언 및 격언 음성 이렇게 세세하게 체크하여 내가 설정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얼마나 훌륭한 어플이란 말인가. 나는 말이 많은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불과 얼마 전까지만해도 ‘않는다’였다) 궁금하지도 않을 말을 아주 길게, 거기다가 나에게 끊임없는 질문을 해대는 류의 사람들을 딱 싫어했다. 물론 그 때문에 나를 포함해 그런 인간류인 주변인에게 호대게 침묵당하며 속이 뒤집혀져 있지만 말이다. 하여간 그런 인간류인 나는 음성 설정 팁에 환호하며 ‘와! 다행이야. 난 싹 다 지워버릴 거야. 달리는데 계속 뭐라 뭐라 말하면서 주절대면 너무 싫을 듯’ 그랬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 지 모르고 말이다. 한치 앞을 볼 줄 모르는 인간이란. 쯧쯧쯧.


그렇게 ‘싹 다 지워버릴거’라는 나는 막상 시작할 무렵이 되자 망설였다. 그리고 궁금해졌다. 무슨 말을 할 지 말이다. 트레이너는 무슨 말을 해 줄까? 언제 어떤 말을 할까? 한번만 들어봐? 그래, 해 보고 선택하면 되니까. 뭐. 그렇게 모든 트레이너 음성을 다 듣기로 하고 시작된 나의 Run Day는 기본 8주를 훌쩍 넘어 8달도 넘은 듯하다. 그 만큼 오래했다는게 아니다. 8주 완성으로 해야할 것을 하다 못하다 하다 못하다, 다시 코스의 처음으로 돌아가길 반복하다 이제는 일년이 다 되어가는 것이다. 그럼 어떠냐. 나는 오늘 코스의 마지막 날을 앞두고 트레이너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고 있는 중이다. 하하하하.


상황을 분석했겠지. 코스마다 어느 지점 어느 때 사람들이 어떨 지 말이다. 그렇게 트레이너는 나에게 필요한 정보를 주고, 격려를 하고, 시간마다 피드백을 하며 염려를 하고, 파이팅을 외쳤다. 이 허무맹랑해 보이는 음성은 그렇게 나에게 힘을 주었다. 어줍잖은 공감의 말이나 조언이 아닌 내가 선택한 이 기계적인 음성은 그렇게 감정없이 깔끔했다. 나는 지금도 이렇게 기계의 음성과 나를 모르는 타인의 쇼와 연기를 보며 힘을 얻는다. 내가 취사선택할 수 있어서 좋고 필요할 때 보고 들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운이 나쁜 몸으로 태어나 누구는 운동 하나 하지 않아도 괜찮은 몸이 있다면 공들여 해도 그다지 좋지 않은 몸도 있는 법이다. 힘들여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안되는 건강신호를 받고서야 떠밀리다시피 Run Day를 시작했다. 트레이너가 오늘 그랬다. 동네방네 자랑하라고. 흠. 좀 바빠서 동네방네는 못하고 글로만 남겨본다. 나 오늘 30분 달리기 마지막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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