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슬기 Aug 08. 2021

통장에 찍힐 숫자 몇 개

금융 테라피가 역시 최고인 프리랜서 일기.

     생각해보면, 살면서 다양한 것들에 대해 기대하는 것이  높다. 인간관계에 대한 기대감은 나름 많이 내려놓고 살고 있다지만 유일하게 내려놓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연인에 대한 기대? 그뿐만 아니라, 먹는 것에 대해 기대하는 것도 높고. , 일을 하고 일을 완벽하게 해내고 싶은 나에 대한 기대도 높고. 월요일 아침 오는 에세이 드라이브 피드백도 너무 기대되고, 화요일 저녁에 오는 글감들도 기대되고. 기타 등등  많은  같은데 막상 적으려니 생각이  난다. 아무튼.    

 



    그런데 사실 이번에 하고 싶은 얘기는 따로 있다. 바로 '입금'에 대한 기대. 프리백수가 된 지 어언 사 개월 차. 두 달은 넋 놓고 놀았다. 첫 달은 그만두고 받은 월급, 두 번째 달은 대표님께서 주신 외주비. 세 번째 달부터 슬슬 쫄리기 시작하더니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셀프 영업을 나섰다.


 일을 만드니까, 신기하게도 일이 생겼다. 나를 모르는 사진가가 내 포트폴리오를 보고 연락을 해왔고 그렇게 첫 프리랜서 작업을 해냈고, 깔끔한 입금을 받았다. 이제 또 뭐 먹고살지 하던 찰나, 디렉터라고 자신을 소개한 사람에게 연락이 왔다.


        "안녕하세요 실장님! 디렉터 OOO입니다:) 혹시 뷰티 브랜드 리터칭 가능하실까요~? 가능하시다면 장당 페이 얼마 받으시는지 알 수 있을까요???"


     세상에, 이런 날도 오는구나. 나 실장님이래!


     사실 셀프 영업도 '혹시 모를 일이 들어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기대로 인스타그램에 작업물을 올리는 것뿐이었는데, 이렇게 연락이 오다니. 그것도 브랜드에서. 리터칭 페이를 알려드리고 일정을 공유받았는데, 브랜드 담당자에게서는 일정이 지나도록 연락이 오지 않았다.


     속으로 오만 생각이 다 들었지 뭐. '혹시 내 페이가 비싼 걸까?'부터 '브랜드 담당자가 내 포트폴리오를 보고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건가?'까지.


     며칠 기다리다가 결국 먼저 아주아주 조심스럽게 디렉터에게 연락했다.


        "마감 일정이 지났는데, 혹시 캔슬된 걸까요?"


     알고 보니, 브랜드에서 셀렉이 딜레이 된 것이었고 연락한 그날 리터칭 컷들이 전달될 예정이었다고.





     그날 오후 리터칭 컷들을 전달받고 작업을 진행했다. 사실 이번 주 내내 여든세 명의 인물들과 브랜드 리터칭 컷들을 진행하느라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매일 하던 저녁 수영강습도 가지 못했고, 아침 공복 헬스도 가지 못했다. 몸과 정신은 찌뿌둥한데, 마음만큼은 왠지 좀 맑다.


     이럴 수 있는 힘의 원천은 단 하나. 바로 이 모든 것들이 끝나고 나면 통장에 찍힐 숫자 몇 개.





        모니터 앞을 떠날 수 없는 나날들이 이어져 8월에 닿았다. 약 한 달 만에 처음으로 늘어지게 쉬는 일요일. 이전에 적은 글을 브런치에 옮기며, 통장에 찍힌 숫자 몇 개를 본다. 금세 이렇게 저렇게 사라질 숫자들이라도, 다음이 또 있기를 바라는 프리랜서의 마음.

매거진의 이전글 나를 기다리는 인물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