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른 Mar 04. 2020

생이라는 형벌의 집행자가 되지 않기 위하여

영화 <가버나움 Capharnaum(2018), 나딘 라바키>를 보고


 때에 예수께서는, 자기가 기적을 많이 행한 마을들이 회개하지 않으므로, 꾸짖기 시작하셨다. “고라신아, 너에게 화가 있다. 벳새다야, 너에게 화가 있다. 너희 마을들에서 행한 기적들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했더라면, 그들은 벌써 굵은  옷을 입고, 재를 쓰고서, 회개하였을 것이다.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화가 있다.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치솟을 셈이냐? 지옥에까지 떨어질 것이다.  가버나움에서 행한 기적들을 소돔에서 행했더라면, 그는 오늘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 ‭11:20-24‬ ‭[새번역])



영화를 보고 며칠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영화에 관해 한 문장조차 써내려가기가 어렵다.

태어난 게 죄인 수많은 영혼들, 그들의 끝 간 데 없는 비극을 훌륭한 형식으로 담아낸 작품이다.

영화 외적인 부분들의 윤리적인 아름다움은 단연 말할 필요도 없다.


신이 있다고 믿는 순간,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수많은 불행과 비극들을 다름 아닌 신 자신이 그대로 내버려두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래서 신을 믿는 것은 고통스럽다.

신을 믿는 이들은 신이 선하다고 믿는다. 실수하지 않고 완전하며 유일한 존재라고 믿는다. 그와 같은 신의 통치 아래에서, 그렇다면 현재의 고통은 마땅한 것이 된다. 내가 고통받는 것을 원하는 나의 신, 그러나 동시에 어떤 이에게는 부와 명예와 행복과 편안한 삶을 아낌없이 선물해주는 신, 그 신은 과연 어떻게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


믿음이 선물처럼 주어지는 것일진대, 한 번 받았으면 싫어도 거부할 길 또한 없다. 오늘도 신을 믿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믿는다. 태어남이 죄인 이 참혹한 인생이 축복인지 저주인지 또한 신만이 알고 있다는 것을.


주인공 자인은 자신을 세상에 태어나게 했다는 이유로 부모를 고소했지만 누구도 이 세상을 만들었다는 이유로 신을 고소하지는 못한다. 소를 진행할 수 있는 유일한 주체 역시 바로 그 신이기 때문이다.


억울한가. 혹은 죄스러운가.

그 억울함과 죄책감을 위해 할 수 있는 일 역시 오로지 생에 묶여 있다.

모든 이에게 생은 저주인 동시에 축복이다. 선물인 동시에 벌이다.


인간만이 자기 자신의 존재에 관해 스스로 묻는다. 다만 그 물음을 지나치게 이른 나이에 할 수밖에 없었던 이 땅의 수많은 자인들, 이들에게 있어 생이 벌이 아니라 선물이 되도록 만들어줄 수 있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어쩌면 또 다른 하나의 인간의 생이 해낼 수 있는 일이다. 그 반대 역시 마찬가지고 말이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한 모든 시도는 박수를 받아야 한다. 영화 <가버나움>은 분명히 해냈다.

결코 끝내지 않을 싸움에 대한 의지가 담긴 이 작품의 엔딩은 삶의 무게만큼이나 무겁다. 보여주는 영화, 질문하는 영화로서 굉장히 잘 만들어진 작품이다. 계속 보고, 계속 질문할 몫이 관객에게 남겨진다.

다만 마지막 한 가지 질문, 타인의 고통에 관한 문제가 남는다.

이 영화에 대한 감상을 마무리 짓기 위해 수전 손택이 필요하다.





“연민은 변하기 쉬운 감정이다.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이런 감정은 곧 시들해지는 법이다. ...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는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 주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연민은 어느 정도 뻔뻔한 (그렇지 않다면 부적절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우리가 상상하고 싶어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휘저어 놓는 고통스런 이미지들은 최초의 자극만을 제공할 뿐이니.”
- 수전 손택, <타인의 고통> 중

과연 나는 생이라는 형벌을 받아내고 있는 누군가의 형벌 집행자가 아니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나?


(2019.2.)


이전 15화 '나'라는 복을 발견하기 위하여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