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른 Apr 23. 2020

한번 시작되면 멈춰지지 않는 그것을 위하여

윤성현 감독 영화 <사냥의 시간(2020)>을 보고

*영화 <파수꾼>에 관한 약간의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영화 초반에는 감독의 전작(이자 데뷔작이자 대표작)인 <파수꾼>과는 주연 캐릭터들이 흡사한 데다 출연하는 배우들까지 겹치는데도 불구하고 느낌이 많이 다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영화가 중후반부를 넘어가면서부터 서서히 감독이 담고자 했던 메시지의 윤곽이 잡히면서 <사냥의 시간>이 사실 어떤 측면에서는 단지 다른 곳에서 펼쳐진 <파수꾼>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영화 <파수꾼(2010)> 스틸


  사실 <파수꾼>과 <사냥의 시간>은 비주얼적으로(라 쓰고 예산이라 읽는다) 큰 차이가 있어서 그렇지 인물들을 놓고 보면 애초부터 거의 겹쳐진 모양새를 하고 있다. 특히 두 영화에 모두 출연한 이제훈과 박정민 배우를 보고 있자면 <파수꾼>을 본 관객이라면 누구나 느낄 수밖에 없는 큰 기시감을 마주하게 된다. 영화 <파수꾼>의 관객을 처음부터 끝까지 끌고가는 동력이자 의문이자 영화의 핵심은 바로 '관계' 그리고 '파국'이라 할 수 있겠다. 어느 영화의 카피로 써도 다 어울릴 만치 낯익은 '우리.. 어쩌다 이렇게까지 된 거지?' 같은 문장이 딱 어울리는, 그들의 관계의 파국. 이들은 대체 어쩌다 그렇게까지 돼버린 걸까.


영화 <사냥의 시간(2020> 촬영현장 스틸


  친구들이 있다. 10대 혹은 20대의 남자들. 대부분의 그 나이대가 그렇듯, 가족보다 더 가까운 그런 친구들이다. 그런 그들의 관계에 어느날 예상치 못한 균열이 생긴다. 그 균열은, 마치 커다란 바위 아래 뿌리내린 나무의 씨앗이 움트면서 단단한 바위의 틈새를 파고들어서는 자라면서 마침내 바위 전체를 둘로 쪼개버리듯, 처음엔 미묘했으나 점차 상상도 못했던 비극으로 그들을 끌고가는 균열이다. 친구들은 다소 나쁘기도 하고, 다소 용감하기도 하지만 사실 정말로 큰 일을 마주하기엔 어리고 약하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에게 어느 정도의 비극이, 어느 정도의 불행이 따를 수 있을지를 차마 예상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것은 영화를 보는 우리 모두가 마찬가지다.


  윤성현 감독은 '표현하고자 하는 것'에도 물론 집중하지만, 그보다 '관객이 영화를 보며 어떤 생각을 할지'를 염두하며 작품을 만드는 데 중점을 두는 것으로 보인다. <파수꾼>은 '기태가 왜 죽었을까?'라는 질문을 초반부터 던진다. <사냥의 시간>은 '이들은 왜 쫓기고 있는 것인가?'를 (예고편에서부터) 묻게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두 질문은 모두 결과적으로 답은 있는 질문이지만, 그 답 자체가 중요하다기보다는 답을 구하기 위해 관객의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일 자체가 중요하다. 윤 감독은 그것에 집중하기 때문에 관객들에게 그러한 '질문의 시간'을 가능한 범위 내에서 충분히 주고자 한다.


영화 <사냥의 시간(2020)> 스틸


  관객이 열심히 질문의 답을 찾아가는 동안 흘러가는 러닝타임에 따라 점점 더 파리해져가는 화면 속 인물들은 안쓰럽기 짝이 없다. 그들 중 누구도 '일이 이렇게까지 될 줄' 예상했던 사람은 없고, 그렇게 이들의 무력함이 부각되어감에 따라 관객의 시선은 이들에게서 이들을 둘러싼 주변으로 이동하게 된다. 이들의 모든 선택과 시도와 실수와 좌절, 그 배경에는 무엇이 있었는가. 관객은 머리가 터지도록 고민한다. '도대체 왜.'


  <파수꾼>이 엔딩크레딧이 다 올라간 뒤에도 긴 여운을 남기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그토록 긴 시간 동안 멈추지 않고 던져야 했던 질문의 관성일 것이다. 너무 길었던 질문은, 답을 구한 뒤에도 쉽게 멈춰지지 않는다. 답을 얻자마자 쉽게 멈춰지는 질문이라면, 아마 그만큼 가벼웠던 것이리라. <파수꾼>을 다 보고, 사건의 전말을 알고, 질문의 답을 구한 뒤에도 영화 속 인물들이 계속 말을 걸어오는 것처럼, <사냥의 시간>을 다 보고난 뒤에도 사냥과 추적은 계속 이어지는 듯한 느낌이 든다. 이건 단순히 영상이 남기는 여운만은 아니다. 처음의 그 질문이, 사냥과 추적이, 정말로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파수꾼(2010)> 스틸


  인간은 살아있는 한 계속 외로워야 한다. 함께 웃을 때도 있지만, 결국은 다시 혼자인 자리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추격자인 '한'은 말한다. '벗어날 수 없다'고. 생이라는 테두리 안에 있는 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한번 시작되면 멈춰도 멈춰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비로소 하나의 작품이 더 완성되면서 윤성현 감독의 세계관이 윤곽을 보이는 듯하다. <파수꾼>은 기태가 죽은 바로 그 시점에서부터 시작된다. 기태는 왜 죽었을까. 그 이유를 낱낱이 밝혀내 시간적, 논리적 순서에 따라 싸그리 정리해낸다 해도 같은 질문은 멈춰지지 않는다. 애초에 맺어질 수 없는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사냥의 시간> 속 어느 순간부터 시작된 사냥은, 멈춰지지 않는다. 사냥꾼이 죽는대도, 사냥감이 없어진대도. 애초에 그들이 발 딛고 서있던 곳이 바로 사냥터이기 때문이다.


영화 <사냥의 시간(2020)> 스틸


  농담 삼아 덧붙이자면, 이 영화의 개봉 과정 자체가 바로 이와 같은 사냥의 시간 아니었나 싶다. 작품에 대한 정보가 알려지자마자 많은 영화팬들의 주목을 받았고, 이래저래 개봉이 미뤄질수록, 그래서 기다리던 영화를 자꾸만 못 보게 될수록, 어쩔 수 없는 기대감은 무한대로 커져만 갔다. 나도 그처럼 애타게 이 작품을 기다려 온 사람 중 하난데, 영화를 다 보고난 지금도 이젠 멈춰야 하는 그 기대감이 어쩐지 여전히 앞으로 달려가고 있는 듯한 묘한 기분을 느낀다. 이 영화에 생각보다 많이 실망한 관객이 있다면, 아마 이 때문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영화의 제목이 <사냥>이 아니라 <사냥의 시간>이라는 점을 곱씹어 본다. 시간은 본디 기다려주지도, 멈춰지지도, 끝도, 없다.


이전 11화 가만히 있지 않기 위하여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