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른 May 02. 2020

가만히 있지 않기 위하여

영화 <나쁜 나라(2015)>를 보고




세월호의 공소시효가 내년이면 만료된다. 참사 발생 이후 6년이 지난 최근 몇 주 동안 그 어느 때보다도 참사를 진지한 태도로 마주하게 된 나는 이제 와 알게 된 것들을 왜 이제야 알게 되었는지, 지난 시간들 동안 나는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던 건지 많이 자책했다. 하지만 이제는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타이밍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세월호와 관련한 진실을 밝혀낼 수 있는 마지막 1년이 남은 지금, 세월호에 대한 기억들이 거짓말처럼 잊혀가고 그 배가 그랬듯 무겁게 가라앉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다시 세월호를 마주할 때라는 생각. 다시 외면하지 않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


영화는 참사 이후 충분히 애도하고 슬퍼할 새도 없이 진상 규명을 위해 투쟁하는 유족들의 모습을 다루고 있다. 2015년 제작된 이 다큐멘터리에 담긴 이들의 상황은 6년이 지난 지금 시점에서는 참사 직후에 해당하기 때문에, 오로지 피해자들의 호소만 있을 뿐 어떤 것도 명확함 없이 혼란스럽기만 한 당시의 분위기가 그대로 드러난다. 내가 가장 마음이 아팠던 것은, 화면을 통해 본 유가족분들의 모습을 나도 당시에 분명히 보았으며, 보았음에도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세월호의 진실, 이제 와 분명해지는 한 가지의 진실은, 바로 우리들이 가만히 있었다는 것, 가만히 있으라는 강력한 명령을 들은 사람들처럼 가만히 있었다는 그것이다. 당시 학교에 가기 위해 매일 2호선을 타던 나는 전철역에서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위한 서명운동을 하고 계신 분들을 항상 마주쳤었다. 캠퍼스 안에서도 몇몇 학생들이 뜻을 같이해 서명운동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결국 거기에 서명을 했느냐 안 했느냐도 중요하겠지만, 그 모습, 온통 노랗던 서명 테이블과 현수막과 티셔츠 들, 그것을 바라보고 지나칠 때의 불편한 감정은 아마 누구든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다. 강의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할 때도, 뭐가 옳은지 아직 충분히 모른다는 생각에 애써 판단을 미룰 때도, 나 하나 정도는 그냥 넘어가도 충분히 서명이 모일 거란 합리화를 하며 지나갈 때도, 생각보다 오랜 기간 눈에 보이는 서명운동의 모습에 결국 다가가 조용히 이름을 적을 때도, 나를 붙잡는 손길에 이미 서명을 했다며 고개를 숙일 때도, 언제나 나는 참 불편했다.


‘이제 그만 하라’고 말하는 이들의 속마음이 사실은 내가 느꼈던 불편함과 같은 것일 거라 생각한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내가 운이 좋았다는 것을. 남의 일 같은 저 비극이 사실은 얼마든지 내 일이었을 수 있다는 것을. 그렇게 죄의식을 느끼지만, 무의식은 필사적으로 그러한 인식을 부정한다. 최대한 사건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으려 한다. 평화로운 일상에 조금의 균열도 허락하지 않으려 한다. 저들의 눈물이 나와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자꾸만 상기시키는 노란 리본들이 불편하기만 하다. 내 생활의 무심한 항상성을 유지하고 싶은데, 그저 아무것도 모르고 있으면 편한데, 모를 수 없게 만드는 목소리들이 불편하다. 그럭저럭한 내 삶이 그럭저럭 유지되는 그럭저럭한 나라에서 계속 그럭저럭 살고 싶은데, 아등바등 발 붙이고 서있는 이 땅이 썩은 땅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그걸 인정하고 나면 내가 이 땅에 뿌리내리고 맺어낸 열매마저 다 썩은 게 돼버릴까 봐 두렵다.


‘엄마 아빠가 세상을 너무 몰라서 죽은 아이가 이렇게 세상을 알려주는 모양’이라던 한 유가족 분의 말이 아팠다. 세월호 참사는 아주 슬픈 일이지만, 결코 슬프기만 한 일은 아니다. 300명의 죽음이 이대로 흘러내린 눈물처럼 조용히 증발해버린다면, 그것이야말로 정말 슬픈 일일 것이다. 세월호 참사는 이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똑똑히 알려준 사건이다. 너무 아파서 눈물을 철철 흘리며 눈에 찔러 넣은 콘택트렌즈다. 보이지 않던 것들을 비로소 뚜렷이 보이게 하는.


‘가만히 있으라’는 말은, 침몰하는 배에 탄 아이들에게만 들려왔던 목소리가 아니다. 지금 이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그 목소리를 듣고 있다. 그냥 편하게 가만히 있으라고, 귀찮고 번거로운 일은 굳이 할 필요가 없다고, 어차피 달라질 건 없다고, 겨우 너 하나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고, 주변에 피해만 주는 거라고, 그러니까 그냥 가만히 있으라고. 그 목소리를 따라 정말 가만히 있으면 어떻게 되는지를 우린 똑똑히 보았다. 그래 가만있으면 이제 여기 다 죽는 거다. 움직인다고 다 움직여지진 않겠지만 움직이기 위해서는 힘을 줘야만 한다. 내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것도, 한 번 비명을 지르기 위함이다. 잠들어있는 사람들이 다 놀라서 깨도록, 잃어버린 줄 알았던 기억이 다 돌아오도록, 크게 계속 소리 지르고 싶다. 이 나쁜 나라에서.



이전 10화 지나가버린 우리의 모든 봄날들을 위하여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