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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른 May 29. 2020

지나가버린 우리의 모든 봄날들을 위하여

영화 <봄날은 간다(2001)>를 보고



오래된 한국 멜로 영화들에 대한 잣대가 좀 높은 편인데(가령 내가 아는 모두가 좋아하는 8월의 크리스마스를 나는 전혀 좋아하지 않는다), 이 영화는 그리 집중해서 보지 않았음에도 이론의 여지 없이 아름다웠다. 참 아름다운 사람이, 참 아름다운 사람들과 찍었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서두르지 않는 아름다움이 배어있는 영화. (역시 8월의 크리스마스를 다시 봐야 하나 싶다.)


뛰어난 작품들은 다음 세대 관객들에 의해 종종 오해를 사곤 한다. 이를테면 이 영화 역시 어떻게 보면 온통 뻔한 대사들과 클리셰 덩어리로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 알고 보면 그 유명한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조차 바로 이 영화에서 나온 대사라는 것.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고 말할 때 유지태의 씁쓸한 웃음이 킬링포인트.



나는 아름답고 훌륭한 것이 왜 아름답고 훌륭한지를 따져묻고 파헤치는 일은 중요하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 일은 자주 새로운 메타적 아름다움을 생산해내곤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끔은, 그저 아름다운 것을 아름다운 대로 질문하지 않고 두고 싶어지는 때가 있다. 요즘이 그렇다. 이런 때는 곧 내게서 글이 안 나오는 때이기도 해서 영 찝찝한 시기지만, 그런대로 편하기도 하다.


인풋이 있으면 반드시 아웃풋이 있어야 하고, 하나를 얻으면 반드시 하나를 잃는 것이라 생각하며 살아온 나는, 내 의지로 식물을 길러본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런 내가 요즘 며칠째 반려식물을 수소문하며 알아보고 있다. 사람처럼 말을 하지도, 강아지처럼 돌아다니지도 않고 아주아주 조용하고 아주아주 가만히 초록의 숨을 쉬는 그것을 그저 가만히 바라보고 있고 싶다. 그저 이런 마음으로 감상하면 그만인 영화들이 있다. 이 영화의 두 주인공이 수집하러 다니는 자연의 소리같이, 불어와 살갗에 닿는 바람같이, 그렇게 머무르듯 움직이는 영화.





봄날은 가고, 또 온다. 다가올 봄은 결코 지나간 봄과 같을 수 없지만, 지나간 봄이 있기에 다가올 봄을 기대할 수 있다. 봄이 지나간 자리에 아무리 매서운 여름의 더위가 남았다 해도, 그 봄의 향기로웠음과 아름다웠음은 변하지 않는다. 그 뒤로 그들이 어떤 세월을 보내든 상우(유지태)와 은수(이영애)가 함께한 시간의 아름다움은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있는 것처럼, 배우 유지태와 이영애의 가장 아름다웠던 어느 한 시절도 이 영화를 통해 고스란히 남았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우리는 모두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사랑은 변한다. 지독히도 잘. 그러나 슬프고도 희망적인 한 가지 진실은, 사랑은 변하기 전까지는 변하지 않았다는 것. 그것은 참으로 가변적인 사랑의 속성을 잘 알고 있다 해도 또 다시 사랑하기를 포기하지 않을 이유이고, 지금 이 봄이 지나가버린다 해도 주저앉아 울지만은 않아도 되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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