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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른 Jun 07. 2020

목소리를 얻기 위하여

영화 <갈매기(2020), 김미조>를 보고

- 제21회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부문 대상 수상작 <갈매기(2020), 김미조> -

(스포 있음)



  “요새는 죄다 권리 타령이야. 사서 고생이지, 날도 더운데. 저런다고 해결이 되나.”


  요새는 죄다 권리 타령이다. 실제로 모두에게 권리들이 있기 때문이고, 동시에 그 권리가 마치 타령을 하듯 지겹게 읊고 또 읊어대야만 겨우 취할 수 있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타령’의 뜻은 ‘어떤 사물에 대한 생각을 말이나 소리로 나타내 자꾸 되풀이하는 일’(표준국어대사전)이다. 그러니 ‘권리 타령’을 하기 위해서는 말이나 소리가 필요하다. 재개발로 투쟁 중인 시장 상인이자 딸의 결혼을 앞두고 있는 중년 여성에게는, 목소리가 있을까.





  영화는 주인공인 오복(정애화 분)이 일터인 시장에서 남편(이장유 분)과 함께 출발해 딸(고서희 분)의 상견례 자리에 참석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상견례가 끝나고 어두워진 밤, 시장으로 돌아온 오복은 재개발 사업에 관한 투쟁 활동조끼를 입은 시장 상인들의 술자리에 끈질긴 합석 권유를 거절하지 못해 참석하게 되고, 술자리가 파한 늦은 새벽 재개발 대책위원장인 기택(김병춘 분)에게 성폭행을 당한다. 이후의 스토리는 간단하다. 성폭행의 피해자인 오복이 사건을 고발하고 가해자에게 죄를 물을 수 있을 것인가, 그를 둘러싼 수많은 어려움을 딛고 끝내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것인가를 물으며 섬세하게 오복을 따라가는 것이다. 처음에 그는 사건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조용히 묻어둔 채 지나가려 한다. 누구에게도 말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험한 일’을 당한 것을 사돈이 알게 되면 딸의 결혼이 순탄하게 진행되지 않을 수도 있고, 재개발 건이 중요한 만큼 기택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있는 시장 상인들은 기택의 편을 들 것이며, 무엇보다 이 일을 누군가에게 알리는 일 자체가 수치스러운 까닭이다. 오복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스피박은 억압당하는 하위주체인 ‘서발턴(subaltern)’은 사회구조적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다는 유명한 문제제기를 한 바 있다. 오복은 목소리를 갖지 못한다.





  우리는 특별한 상황이 아닌 이상 모든 인간이 목소리를 갖고 태어나며, 그것을 통해 자신의 의견을 언제든 자유롭게 피력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말할 수 있는 권리는 타자로부터 부여받는 것이다. 말은 반드시 청자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언어의 형태를 취하든 미처 그렇지 못하든 간에, 모종의 의미를 지닌 목소리는 화자 본인이 아닌 최소 한 명 이상의 타자에게 전달되어야만 그 의미를 발현시킬 수 있다. 그것이 바로 ‘말한다’는 것의 본질이고, 잘 생각해보면 이 단순해 보이는 행위가 실제로는 얼마나 복잡하고 다양한 조건을 만족시켜야만 가능한 어려운 일인지를 알 수 있다. 가령 내가 한 말로 인해 사랑하는 딸이 결혼을 하는 데 문제가 생긴다거나, 꼭 쟁취해내야만 하는 공동체적 투쟁의 결과를 어그러뜨리게 된다거나, 나 자신이 더럽거나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받으며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당한다거나 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할 이야기와 그것을 전하기 위해 구사할 언어가 있다고 해도 결국 한 마디도 입 밖으로 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 모든 것과 혹은 그 이상을 다 감당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만 꺼낼 수 있는 그토록 어려운 말, 그것이 “나 성폭행 당했어”이다. 가족과 일터를 넘어 존재와 세계 자체를 짓뭉개버리는 말의 무게다.





  경찰도, 동료 상인들도, 가족들도, 오복의 청자가 되어주지 않는다. 오복은 딸에게, 경찰에게, 시장 상인들에게 차례로 피해 사실을 알리지만, 이야기를 듣는 이들은 무력하거나, 무관심하거나, 때로는 잔혹하기까지 할 따름이다. 권리라는 것은 마치 한정된 재화의 하나인 것처럼 보인다. 내가 나의 권리를 인정받기 위해서는—그것이 다름 아닌 ‘인권’이라 할지라도—다른 사람의 권리를 그만큼 빼앗아야 하는 것만 같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그것을 찾으려는 목소리를 내길 주저한다. ‘그냥 똥 밟았다 생각하고 꾹 참고 넘어가’기를 권유받는다. 너 하나만 희생하면 모두가 편한데, 왜 그걸 못 참아서 모두가 피해를 보게 만드냐는 말을 듣는다. 그런 말을 하는 이들이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권리를 가졌다고 믿는 것과 같이, 그 말을 듣는 이에게도 비슷한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려 하지 않는다. 오복은 말을 할수록 점점 더 외톨이가 되어간다. 화도 내보고 애원도 해보지만, 세계는 피해자인 그에게 되려 잘못을 물으려고만 한다. 목소리를 내면 낼수록, 그는 더욱 목소리를 잃어갈 뿐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영화 중간에 등장하는 딸의 시점쇼트는 상징적이다. 연립주택 앞에 주차된 차에 타기 전 그는 엄마와 아빠가 각기 서있는 집을 바라보는데, 아빠는 사방이 트인 옥상에서 난간에 기댄 여유로운 자세로 환한 웃음을 띠며 딸을 바라보고 있고, 아래층의 집 안에 있는 엄마는 어두운 얼굴로 창문의 사각형 프레임 안에 갇혀있는 모습이다. 이 화면 전체를 어지럽히는 여러 갈래의 전깃줄들은 이들 가족 모두를 둘러싼 복잡하고 녹록지 않은 상황을 보여주는 듯하지만, 결국 그 가운데서도 사방이 가로막힌 채 홀로 있는 것은 오복이다. 아빠는 처음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속 편한 인물로만 그려지나, 사건에 대한 소문을 듣고 난 뒤로는 오복에게 ‘성폭행은 여자가 응하지 않으면 절대 일어날 수 없다’는 등의 말을 하며 오복에게 상처를 준다. 오복이 다양한 방법으로 최선을 다해 자신의 이야기를 해도 가해자에게 조금의 위해도 가할 수 없는 것과 대비되는, 생각하는 바를 가볍게 입에 담는 것만으로 상대에게 아주 큰 영향을 미치는 모습이다. 누군가에게 어떤 목소리는 때로 너무 쉽게 주어지곤 한다.


  그렇다면 오복이 목소리를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는 어떻게 해야 청자를 얻고 말할 권리를 부여받을 수 있을까. 사실상 이 영화 속에서 그 해답을 얻기는 어렵다. 다만 한 발짝 떨어진 메타적인 관점을 통해, 감독이 이 영화 자체를 하나의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 수 있다. 오복은 이 사회에서 모종의 피해를 겪은 사람이 일차적인 대안으로 도움을 요청할 만한 모든 가까운 이들로부터 도움을 얻는 것에 끝내 실패한 뒤, 마침내 다른 누구의 도움도 없이 가해자를 직접 찾아가 목소리를 내는 방식을 선택한다. 앞서 이야기한 것과 같이 모든 것을 감당할 준비가 된 큰 용기, 오복은 그것을 가진 사람인 것이다. 그리고 한 사람이 자신의 권리를 보호받으려면 다른 이들의 권리를 그만큼 뺏어야 하는 듯한 것은, 사실 한 사회구성원이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는 단 하나의 효과적인 방법이다. 권리, 그 중에서도 가장 기본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인권을 보장받기 위한 짐을 모두가 조금씩 함께 나눠 지다보면, 언젠가는 누구의 각별한 희생이나 배려를 요구하지 않아도 모두가 사람답게 살 수 있게 될 테니까 말이다.





  다소 서툰 글씨와 틀린 맞춤법으로 직접 자신의 이름과 피해사실을 적은(것으로 보이는) 팻말을 들고 가해자를 찾아가 1인 시위를 벌이는 오복의, 그렁그렁하던 눈에서 마침내 눈물이 흘러내리지만 끝내 고개 숙이지 않는 얼굴을 점점 더 가까이 비추며 영화는 끝난다. 목소리를 얻기 위해 러닝타임 내내 헤매던 오복에게, 이 영화는 스스로가 그 자체로 그의 목소리가 되어주고 있다. 잊을 수 없는 그의 눈빛으로 관객에게 호소한다. 예술은 사람에게 목소리를 내어준다.


  갈매기가 무슨 대단한 힘이 있겠는가. 하지만 바닷가에서 갈매기를 본 적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알 것이다. 갈매기가 얼마나 시끄러운지. 그리고 떼로 날아드는 갈매기들은 또 얼마나 무서운지. 권리 타령이 필요한 이들의 권리 타령이, 모두 필요한 곳에 가 닿게 하기 위해 영화 <갈매기>는 주인공 오복에게, 그리고 그와 같이 목소리를 잃은 모든 이들에게 목소리를 내어주며 함께 시끄럽게 울기를 택하고 다짐하는 영화다. 불필요한 장면의 사용은 피하면서 필요한 내용을 다 제공하는 방식, 조악한 현실의 풍경이 생생하게 드러나는 화면들, 억울하고 힘든 입장이어도 자존심만은 잃지 않는 오복의 성격 등 이 영화의 모든 요소들이 또한 그와 같은 작품의 태도를 섬세하게 뒷받침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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