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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른 Jun 07. 2020

나만 몰랐던 현실을 마주하기 위하여

영화 <파견;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2020), 이태겸>를 보고

- 제21회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부문 배우상 수상작 <파견;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2020), 이태겸> -





본 적 없던 신선한 소재만으로도 영화의 반절 이상을 마냥 재밌게 볼 수 있었다. 거기다 <혜화,동>에서 인상 깊게 봤던 유다인의 연기가 세월만 흐른 채 그대로여서, 그러니까 그 어딘가 독특하게 씁쓸한 사연을 간직한 듯한 분위기와 묘하게 이질적인 자연스러움은 그대로이되 보다 성숙함이 더해진 모습이 반가웠고, 완전한 대세 호감 배우인 오정세의, 최근 다른 작품들과 달리 웃음기 빠진 연기도 강한 존재감과 무게로 영화 전체를 지탱해주었다.



정은 역의 유다인(좌), 막내 역의 오정세(우)



작품에 전반적으로 깔린 은근하게 몽환적인 분위기가 있다. 노골적으로 사회적인 이슈를, 그것도 아주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다루고 있는 영화인데도, 게다가 현재의 군산이라는 명확한 배경과 시놉시스에 구체화되어 있는 정은(유다인)의 상황까지, 모든 것이 너무도 현실적인데 마치 판타지처럼 느껴지는 독특한 영화다. 보기만 해도 가슴이 트이는 군산의 아름다운 자연 풍경과, 그 탁 트인 산과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매일 목숨을 담보로 송전탑을 올라야 하는 하청업체 노동자들의 모순적 대비도 그와 같다. 분명 심각하고 진지한데, 가끔 한 번씩 모든 긴장을 풀어버리는 개그코드들이라든지, 이건 또 뭐야 하며 당황하게 만드는 삽입곡 힙합 음악들이라든지, 거 참으로 알쏭달쏭하게 만드는 영화였다. 그 지루하지 않은 매력.


영화를 보는 내내 도무지 이 영화가 현실을 과장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지극히 사실적으로 현실을 고발하고 있을 따름인 건지 모르겠어서 혼란스러웠다. 내가 정말로 모르는 세계였기 때문이다. 전기회사도, 기술행정직도, 원청과 하청도, 송전탑도, 군산도, 나는 그것들에 대해 전혀 아는 게 없었다. 이 영화가 아니었다면 아마 평생 모르고 살 수도 있을, 또는 이 영화를 보고도 여전히 잘 알지 못하는 세계. 이 세계의 존재를 마주하는 일 자체가 다소의 충격을 줬던 것 같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는데, 아무리 나름의 어려움이 있대도 매일 근무시간마다 감전 및 추락사를 걱정하지는 않아도 되는 곳에서 일하는 이들과, 해고와 사망 중 무엇이 더 나쁜지를 가리기가 어려운 이들의 삶에 대해 생각했다. 일을 하다 죽은 사람들에 대한 최근의 뉴스들, 그들에게 일을 맡겼던 거대한 회사들, 산업재해라는 단어, 일과 목숨의 관계,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잘 모르고 있는 나’를 마주하는 그 새로운 절망감. 그 감정이 바로 이 영화를 보며 느끼는 몽환적 현실성의 축을 이루고 있었다.


이번 전주국제영화제 온라인 상영을 통해 본 두 편의 한국영화 모두 강렬했다. 조용한 듯 강한 이 두 편 모두 정식 개봉을 통해 꼭 많은 관객들이 봤으면 하는 마음뿐이다. 그리고 오히려 전주에 내려갔다오는 것보다 여러모로 훨씬 제약이 덜했음에도 영화를 두 편밖에 보지 못한 게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하지만 일상을 온전히 정지하고 떠나지 않는 한, 영화제를 제대로 집중해서 누리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역시 이번에 경험하며 깨달을 수 있었다. 아쉬운 만큼 다시 찾아올 정상 개최에는 훨씬 더 뜨거운 호응과 교감이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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