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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른 Jun 02. 2020

지금을 살게 하는 추억들을 위하여

영화 <카페 벨에포크(2020), 니콜라스 베도스>를 보고




시간여행이라는 주제가 나에게 언제나 성공적인가 하면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가령 <어바웃 타임>은 모두가 좋아하지만 나는 좋아하지 않는 영화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생각해보면, 시간여행 내지는 기억여행(이런 단어는 없겠지만)에 관한 영화들을 거의 대부분 사랑해마지않는 것 같기는 하다. (개중 잘 만들어지고 유명한 작품들만 봐서 그런 거긴 하겠지만)


아무튼 누가 영화를 좋아하는 내게 인생영화를 하나만 대보라고 할 때면 난 <이터널 선샤인>을 꼽는다. 아무리 좋은 작품도 어지간해서는 두 번 보는 일이 없는 내가 몇 번이고 본 영화. 그리고 볼 때마다 우는 영화. 물론, 처음 볼 땐 후반부터 울지만 다시 보면 처음부터 울게 되는 영화가 바로 이터널 선샤인이라는 건, 아는 사람들은 다 알 거다. 그리하여 나는 <카페 벨에포크>를 영화관에서 엉엉 울며 보고 나와서는 가까운 사람들에게 (전체적인 작품성으로는 물론 하위 호환이라고 생각하지만) 2020년판 이터널 선샤인이라며 추천을 해댔는데,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생각해볼 때 이터널 선샤인이라든지 컨택트라든지 미드나잇 인 파리라든지 그런 영화들과의 차별점이 이 영화에 있느냐 하면, 전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저 이렇게 좋으니, 이거야말로 타임슬립 영화에 대한 타입슬립이라도 되는 건가. 잘 알면서도, 알고 있는 바와 똑같으면서도, 그래서 좋은 것.



그곳, 1974년의 카페 벨에포크



추억은 언제나 아름답다. 아름답지 않은 건 추억이라 부르지 않으니, 추억은 그저 하염없이 아름답다. 물론 돌아갈 수 없기에 아름다운 것이지만, 돌아갈 수 없는 그때를 돌이켜보는 것보다 아름다운 게 있으랴.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고, 그 불안은 쉽게 불행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따라서 인생에 몇 없는 가장 행복했던 순간도, 그 순간이 얼마나 이어질지, 바로 다음 순간 끝나버리지는 않을지 알 수 없으므로 당시에는 온전히 누리기가 어렵다. 허나 그 시간이 지나간 뒤에는 그런 불안을 가질 필요가 없으니 편안한 마음으로 온전히 나의 것인 행복에 푹 몸을 담그면 된다. 이보다 좋은 게 어디 있으랴. 이렇게 추억을 재생하는 일이 너무 좋아서, 오직 추억에 붙들린 채 현재를 살아가지 않으려 하는 사람들마저 우리는 주위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달려달려 추억 속으로 부와아앙



영화는 추억에 관한 이러한 진실을 잘 알고 있는 듯한 눈치다. 주인공인 빅토르 역시 마찬가지다. 모든 것이 기계화, 디지털화된 요즘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며 주위 사람들을 답답하게 하지만, 무조건 ‘옛것이 좋다’고 우기거나 한탄하는 답답한 성격을 지닌 것만도 아니다. 그러기엔 그는 그저, 너무 착하다. 그 나이가 되면 나도 아마 비슷한 모습이 될 것 같다. 배우자한테 모욕에 가까운 무시를 당해도, 그 배우자가 내 친구와 바람이 나도, 세상 모두 나를 답답하고 한심하게 생각해도, 굳이 화를 내거나 반박하거나 스스로를 변호할 필요성을 못 느낄 것 같다. 괜찮아서가 아니라, 그저 더 이상, 나에게 그 어떤 것도 바꿀 만한 힘이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젊고 매력적인 마르고



그런 빅토르의 앞에 젊고 매력적인 마르고가 등장했을 때는, 관객으로서 아무래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에 하나 둘의 로맨스로 이야기가 전개된다면(그럴 일은 없을 거라 믿었지만 딱 그런 믿음만큼) 큰 배신감을 느끼며 실망했으리라. 솔직하게 말해서 늙은 남자와 젊은 여자가 서로 사랑에, 그것도 가정이 있는 상황에서 명백한 불륜으로 서로에게 빠지는 모습은 묻거나 따져보기 전에 상당히 불편한 게 사실이다. 인간의 모든 감정의 형태와 흐름에 전부 공감하지만, 그런 감정의 흐름에 따라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역시 편을 들어줄 수는 없다는 입장이다. 그래서 이 영화가 지킨 선, 마르고의 젊은 매력이, 오직 젊은 시절의 아내(마리안)와는 또 다른 현재적인 새로운 에너지를 빅토르에게 주는 모습이 참 좋게 느껴졌던 것 같다. 추억은 과거의 것이지만, 그것을 불러오는 시점, 그러니까 추억이 실제로 작동하는 시점은 언제나 추억을 떠올리는 바로 그 순간이라는 점에서 매우 현재적이다. 추억이 단지 그때와는 달라진 지금을 한탄하는 데만 쓰인다면 그저 추하고 무기력한 낭만으로만 머물겠지만, 그 아름다웠던 시절 속에서 가장 빛나고 아름다웠던 나와 너를 떠올릴 때 현재가 자극받고 새로워질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추억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가꾼 오늘은 또 미래의 아름다운 추억이 되겠지.



빅토르의 사랑, 지금의 마리안



추억을 다루는 영화, 나아가 시간여행을 다루는 영화는 결국 마지막엔 현재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그 모든 게 결국은 지금을 위한 것, 지금에서 출발한 것이니까. 내가 <이터널 선샤인>을 볼 때마다 눈물을 쏟는 ‘눈물버튼’ 장면은 다름 아닌 “오케이” 장면인데, 너를 송두리째 내 기억에서 없애버리기를 택할 정도로 큰 아픔과 고통을 받았다 해도, 그런 결말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해도, 몇 번이고 다시 돌아가 너를 사랑하겠다는 그 바보 같은 결정이 지극히 인간적이어서, 그 실수 같은 결정 없이는 더 이상 인간일 수 없는 우리들이라서 그렇다. 1974년의 마리안은 아름다웠고, 지금의 마리안은 그동안의 세월만큼 꽤 변했을 수 있지만, 여전히 그때의 그 마리안이다. 지나간 것은 지나갔기에 아름다울 수 있듯, 지금은 지금이기에 괴로운 부분이 있다. 그리고 그것에 가려져있는 여전한 아름다움들. 시간이 지난 뒤 돌아보면 빛나는 추억의 아름다움들은, 없다가 생긴 게 아니라 단지 그때는 ‘지금’이라는 막에 가려져 있었을 따름이다. 그러니 그때의 서로와 지금의 서로가 같은 사람이라는 것, 그때 아름다웠던 두 사람은 여전히 지금이라는 시간 속에서 다른 모습으로 아름답다는 것이 <카페 벨에포크>의 결론이라 하겠다. 되짚어볼 추억 하나쯤 가진 사람이라면, 꼭 그때로 되돌아가고 싶거나 매일 그때를 떠올리며 살지는 않는다 해도 ‘기억하는 존재’로서 모든 인간이 공유하는 ‘추억’과 ‘낭만’ 앞에 웃고 울지 않을 수 없는 듯하다.



빅토르는 스무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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