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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른 Apr 18. 2020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모른 척하지 않기 위하여

이혁상&김일란 감독, <공동정범(2016)>을 보고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영화를 보는 내내 화면을 똑바로 쳐다보기가 힘들 정도였다. 한숨, 그리고 눈물뿐이다..

참사가 벌어진 때, 나는 중학교 3학년이었다. 아무 생각 없는 멍청한 중3. 이 사건에 진지한 관심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세상은 이 날을 계속 기억했고, 마침내 한 살 한 살 먹어가던 내 머리와 가슴 속에도 조금씩 찾아오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2학년 사회 시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정확하지는 않다) 국어 시간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선생님께서 한 라디오에서 용산 참사 현장에 직접 나가있는 조세희 작가와 실시간 전화연결을 한 부분이 담긴 방송 내용 일부를 들려주셨다. 당황스러웠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난 학교에서 잠만 자는 학생이었다. 좋아하던 책 읽기도 이 시기엔 거의 안 했다. 하지만 조세희, 난쏘공의 그 조세희는 모를 리 없었다. 교과서 속의 이름이기만 했던 그 사람이 직접 저기 나가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아니 그보다 저긴 어디지? 무슨 상황이지? 난 당시 그 사건에 대해 아는 게 없었고, 조세희가 정확히 무슨 말을 했는지도 거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나로서는 난생 처음 들어보는, 당장이라도 오열이 터져나올 듯한, 분노와 슬픔을 억누르는 목소리로, 대강 ‘이곳은 참혹하기 그지없다,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는 식으로 말했던 것 같다. 혼란스럽고 충격적이었다. 그저 정체를 알 수 없는, 다소 소란스러운 소음들로 주변이 시끄러웠고, 조세희도 정신이 없어보였는데, 그 모든 게 합쳐진 그 정신없는 소리 자체가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난 게 분명하다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 참사에 대해 아는 게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때 들은 것을 납득하기가 어려웠던 것 같다. 내 작은 두뇌 속 어느 자리쯤에 이 정보를 두어야 할지 가늠할 수 없었다. 아마 그 자리에 있던 대부분의 학생들이 그랬으리라. 당황한 만큼이나 서둘러, 쉬는 시간 종이 치자마자 친구와 장난치고 매점으로 달려가며 들은 것을 얼른 잊어버리려 했겠지. 내가 좀더 수업에 집중하는 학생이었다면, 그때 방송을 들려주기 전에 참사에 관해 틀림없이 설명해주셨을 선생님의 말씀을 잘 듣고 기억했을까. 그리고 좀더 빨리 내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깨닫고, 조금이라도 의미있는 행동들을 했을까. 의미 없는 상상이다.

그렇게 스무 살이 된 나는 국문과에 진학했고,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계속 소설을 읽었다. 난 그냥 유명하고 재미있는 소설들을 읽었을 뿐인데, 많은 소설가들이 자꾸만 자꾸만 얘기하는 것들이 있었다. 5월 민주항쟁, 2009년 용산 참사 같은 것들. 내가 알아야 하는 건 학교에서 다 알려준다고 철석같이 믿어왔던 순진한 내가 정신을 차리기 시작한 게 대체 몇 살 때부터였을까. 알려고 노력해야만 알 수 있는 것들도 많음을, 그런데 그 중 대다수는 궁금하지 않은데도 학교에서 알려주는 것들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들이라는 걸, 나는 조금씩 깨달아갔다.

그 소설들이 없었으면, 그 사람들이 아니었으면, 나는 지금보다 더 몰랐을 것이고, 나뿐만 아니라 이 사회 전체가 그러했을 것이다.

문학을 공부하는 내내, 문학의 쓸모는 풀리지 않는 고민거리이자 내 컴플렉스였다. 아마 모두가 그럴 테지. 사람을 살리는 의사도, 억울함을 풀어주는 변호사도, 필요한 도움을 제공하는 복지사도 아닌 소설 쓰는 사람은 대체 뭘 할 수 있나. 소설만이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하던 날들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때가 분명 더 많았다. 그리고 그럴 때면 이렇게 한 번씩 이 <공동정범> 같은 작품이 날 찾아와 정신을 번쩍 들게 해주는 것이다. 진실을 외면하지 말라고. 세상이 진실을 외면하게 놔두지 말라고.

<공동정범>의 시선은 신중하고도 현명하다. 대범하지만 예민하고 섬세하다. 이와 같이 사회문제를 다루는 다큐멘터리가 올바른 역할을 해내는지 그렇지 못한지를 가르는 것은 사실상 시선의 문제이다. 얼마나 진중하고 섬세하고 예의있게 사건과 사람들을 바라보는가. 그런 측면에서 이 작품은 아주 이상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아직 할 이야기가 남은, 그러나 잊혀져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자세. 이 영화는 듣고, 또 들려준다.

이 영화를 보며 깨닫게 된 소중한 사실은, 이런 작품을 보는 것만도 우리 사회가 진실에 더 다가가게 하는 중요한 한 걸음이며, 이런 작품을 보지 않는 것은 그 자체로 진실을 은폐하고 피해자의 입을 막은 채 그를 영원히 사회에서 격리시키는 데 동조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꼭 이런 작품을 찍거나 쓰지 않아도 괜찮다. 후원금을 내거나, 발로 뛰지 않아도 괜찮다. 단, 모르고 있지만 말아달라. 오늘도 편히 먹고 편히 자는 내 일상의 옆자리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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