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개발자에게
1st June 2019
얼마 전에 사내 컨퍼런스가 있었는데 회사 안의 'Women at Spotify'라는 그룹에서 진행하는 패널 토크를 들으러 갔다. 'Growing Your Career as a Woman in Engineering'라는 주제도 마음에 들었다.
생각의 시작은 이렇다. 패널은 시니어 레벨의 여성 다섯 명이었는데 한 명만이 현직 개발자였고 네 명은 개발자로 커리어를 시작해서 매니저로 전향한 사람들이었다. 같이 있었던 우리 팀 동료도 여성 개발자인데, 그녀와 패널이 너무 편향된 것 아니냐는 이야기를 하면서 빠져나오며 생각해보니 '시니어' 개발자 비율 20%는 사실 패널만의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내가 꽂힌 문제는 시니어 여성 개발자의 부재다. 전 직장에서 세 개의 팀에서 일하는 동안 가깝게 같이 일했던 시니어 레벨의 여성은 딱 한 분이 기억난다. 내 또래에 비슷한 레벨이었던 동료들을 제외하면 회사 안팎으로 찾기가 힘들었다.
그것은 비단 한국 회사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 회사는 개발자의 역할 레벨을 크게 Engineer - Senior engineer - Staff engineer로 나눈다. 내가 일하고 있는 데이터 플랫폼 조직은 스톡홀름 오피스에 50여 명이 있는데 여성 Staff engineer는 고사하고 Senior engineer도 0명이다. 사내에서 오래된 조직이 아니고 플랫폼보다 프론트에 여성 개발자들이 더 많은 (이상하게 들리지만 경험적으로 사실인) 점을 변명으로 할 수 있겠으나, 몇 명에게 묻고 물어서 다른 조직의 여성 Staff engineer 한 명을 겨우 찾을 수 있는 것은 절대 희망적일 수 없다.
신기한 것은 패널 토크에서 들었던 대로 Product manager 중 개발자였다가 매니저로 방향을 바꾼 케이스는 상대적으로 많이 보인다는 것이다. 우리 팀의 PM도 처음에는 개발자였다고 하고, Data scientist로 있었던 사람도 내가 입사하고 얼마 후 PM으로 이동했다.
이 문제가 흥미로운 이유는 테크 컴퍼니에서 일하는 여성들의 범주를 볼 때 시니어 개발자들은 드문 반면 시니어 매니저들은 존재하는 불균형 때문이다. 주니어 개발자들을 팀에 한 두 명씩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상황은 몇 년 동안 지속된 개발자라는 직업이 가진 유행 때문일 수도 있으니 논외로 하더라도, 나의 세대 전에도 여성 개발자들이 있었을 텐데 그녀들은 모두 어디로 간 것일까? 여성들은 개발자보다 매니저에 적합한 사람들인 걸까?
Either women are more likely to move into managerial roles in engineering firms, or they're less likely to stay in technical roles.
컨퍼런스에서 돌아와 이런 현상에 대해 생각하다가 읽어볼 만한 기사*를 발견했다. 여성 엔지니어들이 매니저로 이동하는 것은 성 불균형을 해결하려는 회사 차원의 노력에도 의도하지 않게 불균형을 계속 만들고 있고, 결과적으로 여성들은 매니저가 되지 않으면 엔지니어를 그만둔다고 한다. 그리고 계속되는 불균형은 여성들이 강한 soft skills을 가지고 있고 기술 직군에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편견을 입증하는 셈이 된다는 것이다.
기사에는 매니저로 이동한 개인적인 계기들이 빠져있는데 컨퍼런스 패널 토크나 주변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스토리는 대부분 비슷한 것 같다.
(1) 개발자로 커리어를 시작한다.
(2) 자신이 남의 성장을 도와주는 일을 잘하는 것을 알게 되고 기쁨과 성취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3) 마침 좋은 기회가 생겨 (남의 성장을 도와줄 수 있는) 매니저로 방향을 튼다.
*참고한 기사 Increased number of female engineers in managerial roles brings unintended consequences
매니저들
'매니저'는 포괄적인 직함이기 때문에 외국 회사에서 매니저가 되는 것은 승진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매니저가 개발자와 일하는 방식은 회사마다 차이가 있을 수 있으나, 상하관계가 아니고 개발자들이 개발에 집중할 수 있도록 안팎으로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소프트웨어 회사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정의인 것 같다. 그러므로 개발을 아주 잘해서 매니저로 '승진'하는 것이 아니라, 매니저에게 요구되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동'한다고 보는 편이 적절할 것이다.
이러한 점은 내가 참고한 기사에서도 지적하고 있다. "In business, the highest-status positions tend to be managerial. But in engineering, technical ability is revered while management is what you do if you have good organizational and communication skills," 즉 '비지니스에서는 매니저가 가장 높은 직급인데 반해 엔지니어링에서는 개발 능력을 숭배하고 매니지먼트는 좋은 관리와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있는 사람이 맡는다.'
매니저와 개발자 중 더 중요한 역할을 나누는 것은 아니다. 나는 오히려 스웨덴의 회사로 이직하고 처음으로 커리어가 매니저이고 매니지먼트를 꾸준히 교육받아온 사람들과 일해본 후 중요성을 절감했다. 그들은 어제까지 개발자였던 사람이 오늘부터 한 팀을 책임지기 시작하는 갑작스러운 리더, 또는 하루의 절반은 팀 관리에 나머지는 개발에 쓰는 애매한 매니저도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여성 개발자가 계속 개발자로 성장하는 커리어 패스가 선명하게 보이지 않고 이 길을 지나온 선배들을 주변에서 많이 만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래서 내가 그 길을 갈 때 어떻게 하면 쉽게 지워지지 않을 발자국을 크게 찍을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Women are stereotyped as having less technical competence in engineering, which perhaps explains why men are much more likely to remain on the technical side and women are tracked into the management side.
테크 컴퍼니 안의 다양성을 이야기할 때 이미 시장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이 계속 성장하고 자리를 지키는 것은 새로운 사람들의 유입만큼 중요한 것 같다. 특히 경력을 쌓아서 다음 레벨로 올라갈 수 있는 시기와 출산, 육아의 시기가 인생에서 겹치기 쉬운 여성들의 경우에 그러하다.
여성 시니어 개발자들이 많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사람은 자신의 지식과 경험 안에서 상상하고 미래를 그린다. 나는 여성 시니어들이 그들의 후배들의 상상력의 크기를 넓혀주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시니어 개발자로 남는 것이 여성에게도 선택 가능한 커리어 옵션 중 하나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려줌으로써 후배들의 미래에 또 하나의 다양성을 더하며 미래의 다양성에 기여하는, 열린 결말의 존재들이다.
여성들의 결말이 매니저가 되거나 개발자를 그만둔다 두 가지에서 끝나지 않으려면, 여성들조차 몰랐던 새로운 경우의 수를 찾아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1) 개발자로 커리어를 시작한다.
(2) 자신이 남의 성장을 도와주는 일을 잘하는 것을 알게 되고 기쁨과 성취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3) 마침 좋은 기회가 생겨 (남의 성장을 도와줄 수 있는) 매니저로 방향을 튼다.
(2)에서 (3)으로 넘어가게 만든 트리거가 무엇이었을지 생각했을 때 문득 여성 개발자들이 유독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분위기 같은 것들이 기억났다. 소프트웨어 회사에서는 보통 한 팀에 한두 명의 여성 개발자들이 일한다. 이들이 말하고 글 쓰는 방식, 특히 다른 사람을 도와주거나 함께 일할 때 드러나는 커뮤니케이션은 남성들 사이에서 두드러질 때가 있다.
이것은 남성과 여성의 차이라기보다는, 남성들이 대부분인 회사 집단에서 여성들에게 기대되는 성격이 강조됨으로써 나타나는 현상인 것 같다. 밝고, 친절하며, 정리하고, 질문에 사근사근 대답해주는 전형적인 성향은 외부에서 강요받기도 하고 때론 자신이 스스로에게 강요하기도 한다. 안타깝지만 개인의 캐릭터가 이것을 뚫고 나오려면 시간과 용기가 필요하다.
이렇게 발달시킨 Soft skill은 눈에 띄고 좋은 피드백을 받기 시작할 텐데, 이러한 피드백이 개인에게 강한 트리거로 동작한다는 것이 경험에서 비롯된 나의 가정이다. "동료를 잘 도와준다. 협업과 대외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잘한다. 체계적으로 일한다." 훌륭한 매니저의 자질이 있어 보이지 않나? 그리고 점점 더 많은 Soft skill이 필요한 업무를 맡게 될 수도 있다. 더 잘해보려고 먼저 손을 들 수도 있다.
Having women in managerial roles also tends to validate the idea that women have "soft skills" like the ability to socialize and communicate with co-workers but lack the technical capability to be in a highly specialized role.
정형화된 이미지가 존재하는 것을 알았을 때 어떻게 편견을 탈피하고 개발자의 이미지를 심을 수 있을까. 개인 차원에서 어떤 노력을 할 수 있을까.
우리 회사에서는 1년에 한두 번 동료에게 피드백을 받고 싶은 질문을 이메일로 보내고 답변을 받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질문을 한다. 좋은 질문에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전달할 수 있다. 본인이 어떻게 팀에 기여했는지 설명해달라는 정형화된 질문도 있지만, 더 큰 영향력을 보여주고 싶다거나 팀에 잘 적응하고 싶다는 등 내가 얻고자 하는 것을 질문 안에 녹일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체계적이지 않다고도 볼 수 있는 피드백 방식의 장점은 바로 '체계적이지 않음'에 있다. 내 맘대로 길을 그려놓고 상대방에게 나를 잘 따라오라고 알려줄 수 있는 것이다. 특별히 해줄 말이 있지 않은 이상 피드백을 주는 사람은 질문의 틀에 맞추어 그를 생각하게 된다. 질문을 존중해서일 수도 있고, 과거 6개월이 순식간에 회상하기에 짧지 않은 시간이라 질문에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것일 수도 있다. 피드백을 주는 행동은 심지어 칭찬조차도 자연적으로 보수적일 수밖에 없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나의 첫 피드백에서 한 가지 실험을 해보았다. “What do you think my technical strength is?”
확실하게 나를 기술적으로 생각해달라고 요구했다. 이것은 사람들이 여성 개발자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을 것을 가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어떤 것도 전부 배재하기 위한 방법이다. 이 질문을 받은 사람들은 나의 코드, 코드 리뷰, 설계, 개발 미팅이 어떠했을지 생각해볼 것이다. 내가 시니어 매니저가 되었던 여성 개발자들처럼 매니저에 적합한 개발지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잘한 것이 하나라도 있다면 그 내용을 적어주면서 개발자인 나에 대한 이미지를 조금 더 낫게 바꾸기를 바랐다.
이것이 불균형 안으로 쏟아지지 않기 위한 지속 가능한 나의 작은 발악이다.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정해진 이미지에 맞는 사람이 되지 않고 원하는 이미지를 만들고 증명하기 위한 수단이다. 5년 후에 실험의 결과를 확인해보자!
#스웨덴 #개발자 #해외취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