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자가 스웨덴으로 이직한 썰 15
지구가 넓기 때문에 외국으로 옮기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다른 이유도 정말 많았다).
우리나라는 지구 전체 땅의 1%도 안 되는 작은 나라고, 한반도 밖에는 190개가 넘는 나라들이 있다. 내가 밟아보지 못한 땅은 광활하고 아직 만나보지 못한 나라 사람들이 많고 들어보지 못한 언어가 너무 많다. 나는 한국에 태어났지만 지구에 태어난 인간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막연하게 적어도 살면서 한 번쯤은 삶의 위치를 바꿔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지구본에서 한국에 꽂혀있던 나의 핀을 전혀 다른 나라에 툭 옮겨놓듯이. 그 일이 얼마나 고된지, 외로운지, 또는 신나는지에 상관없이 말이다.
내가 다니는 회사는 90개가 넘는 국적을 가진 삼천 여명의 사람들이 일하고 2016년 기준으로 20개의 나라에 오피스가 있다.
온사이트 인터뷰를 보러 갔을 때부터 다양성은 피부로 다가온다. 전형적인 미국 영어를 구사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내가 처음 듣는 억양으로 말하는 사람이 있었고, 중동에서 온 사람과 태어나서 가장 긴 시간 대화를 나누었으며, 그 날 만난 10명이 넘는 사람들 중 아시안은 딱 한 명이었는데 (당연히) 한국인이 아니었다. 그들도 나와 마찬가지로 한국 사람을 만날 일이 많지 않았을 수도 있다.
Culture 인터뷰에서 들었던 다양성에 대해 기억나는 이야기가 있다. 그 이야기를 한 사람은 스웨덴 사람이었는데 회사에서 여러 명이 영어로 대화하고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자리의 모두가 스웨덴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만큼 이 회사에서 일하는 것은 다양성의 인지에서부터 시작한다. 누가 스웨덴 사람이고 아니고는 우리가 같이 일하는 데에 당장 중요하지 않다.
이런 배경은 리크루터와 처음 통화를 할 때부터 익히 들어왔다. 나의 성향이나 다른 사람들과 같이 일하는 상황을 이야기하다가 내가 외향적인 부분만 이야기를 하니 리크루터가 '우리 회사는 다양성을 가지고 있고 그래서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며 '내향적인 동료들도 있다'라고 정정해주었다.
우리 팀의 다양성을 보면. 7명이 있는데 그중 세 명이 여자, 나머지가 남자인데 개발자만 따져도 성비가 거의 50:50에 가깝다. 우리는 6개의 서로 다른 국적을 가지고 있다. 우리 팀을 거쳐간 사람들까지 포함하면 국적은 더 늘어난다.
유럽만 해도 종종 서로 다른 국적의 사람들이 만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기 때문에 그들에게 다양성은 당연한 것일 수 있으나, 우리나라는 내가 외국에 나가지 않는 이상 주변에서 한국인이 아닌 사람과 가깝게 지내는 경우가 많지 않다. 나는 같은 대학교에서 공부한 몽골 친구가 있고 교환 학생으로 갔던 학교에서 친해진 미국인 친구가 있는데 이 둘이 유일하게 가까운 외국인들이다. 그래서 생일을 축하한다며 제각각의 언어로 메시지를 보내고 누군가 집에서 온 전화를 처음 듣는 말로 받으면, 다양성에 녹아있다가도 우리가 작은 팀에 모여서 영어로 일을 하는 것이 새삼 신기해진다.
쉬운 예로 나이가 있는데 그들도 나의 나이를 가늠하지 못할뿐더러 나도 감이 잘 안 온다. 반년이 지나서야 누가 몇 살이라는 데이터가 쌓이고 얼굴이 눈에 익어서 나보다 어리다, 아니 다를 맞출 수 있는 정도가 될 수 있었다. 내 나이를 모르는 사람은 다섯 살 이상 어리게 보기도 한다. 서양인과 동양인은 피부도 모발도 많이 다르니까.
나이뿐일까, 졸업한 대학교는 물어볼 이유가 거의 없는 수준이고 아이가 있더라도 무조건 결혼을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wife, husband 같은 단어는 함부로 쓰지 않는다. 동료들의 고향은 한국과 너무나 먼 곳인지라 그 동네가 도시인지 시골인지 소득과 생활수준은 어떠한지 짐작이 불가능하다.
다양성의 가치는 '뚜렷한 선이 없는 환경'
한국 사람은 한국 사람의 집단에 대해 잘 안다. 나는 직장 생활을 시작하기 전부터 누군가의 입으로부터 또는 인터넷 어딘가에서 직장 문화에 대해 수없이 많이 들었다. 회사의 상사나 회식이 이렇고 경쟁이 저렇다는 전형적인 한국인의 사회생활은 직접 겪어보기 전부터 너무나 선명하고 치열했으며 고달팠다. 감히 말하건대 한국 미디어를 소비하는 사람이라면 모두 비슷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한국 직장인에게 기대되는 바, 좋은 것과 나쁜 것, 분위기 같은 것을 너무나 미리 잘 알고 있다. 이러한 '직장인 생활 규범'은 (사실 여부와는 관계없이) 선명한 선을 그려놓고 행동 양식을 결정하며 때로 제한한다. 네가 들어가야 곳은 저기다, 더 중심으로 들어가라, 선을 넘으면 큰일 난다라고 경고한다.
경계선이 꼭 나쁜 것은 아니다. 선은 목표가 될 수도 있고 선 안쪽에 있는 것은 소속감을 주기도 한다. 만지면 감전되는 삐죽삐죽한 전기선이 아니라, 운동장에 대충 그려놓은 경기장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오히려 문제는 외부에서 받은 집단에 대한 이미지가 부정적이라서 전투력이 쓸데없이 높아지는 것인 것 같다. 그래서 일찍 몸에 힘이 들어가고 전투 자세를 취해서 그 안의 좋은 것들을 충분히 느끼지 못한 것 아닐까. 이것은 회사를 퇴사하고 비로소 그때를 겸손하게 회상하는 나의 반성이기도 하다.
나는 다양성의 가치를 '뚜렷한 선이 없는 환경'이라고 생각한다. 기준선이 없는 것은 본질적인 나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뜻이다. 기준을 따라가려고 노력하지도,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하지도 않으며, 회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은 속도와 방향으로 더듬더듬 뒤지고 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나 자신으로 존재하므로 회사에서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 내가 일 하는 것을 정말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환경을 바꿔보니 아니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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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여기까지 써놓고 내용이 모호한 것 같아서 오랫동안 고민했지만 더 나은 말을 찾지 못했다. 누가 보기에는 내 변화가 단순히 회사가 여유롭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고, 전혀 와 닿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변화를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글을 마무리짓는다.
이 환경은 내재된 디폴트 열정의 크기를 보여준다. 모든 것을 다 알고 싶어 하던 욕심 많은 나는 바쁘게 돌아가지만 동시에 자기 개발도 챙겨야 하는 한국 회사가 씌운 가면이었던가. 여유로운 회사에서 일하며 부지런히 공부하는 상상 속의 개발자는 안타깝게도 존재하지 않았다.
알고 싶어 하는 힘이 반쯤 줄어들었고 가끔 모르는 것은 모르는 대로 놔둔다. 예전에는 우리 팀에서 쓰는 기술에 대한 책은 한 권이라도 꼭 챙겨봤는데, 지금은 궁금하지 않으면 필요한 것만 가볍게 찾아보는 정도로 그친다. 내가 정말 '상상 속의 개발자'같은 사람이었다면 주어진 시간에 상관없이 좋아하는 공간에서 좋아하는 일을 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은 더 치열하게 고민하고 기회를 찾아야 한다. 화사에서 앞가림을 하는 것이 전적으로 개인의 책임으로 바뀌는 것이다. 누구도 먼저 푸시하지 않고 눈치도 주지 않는다. 매니저와 면담을 할 때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정확히 말해야 누구와 이야기를 하라거나 어떤 기회가 있다는 둥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먼저 선택지를 주고 선택하라고 하는 법이 없었다.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만큼 할 수 있는 자유, 그리고 무엇을 좋아할지 선택할 수 있는 선택권. 나 자신의 공간을 쿵쾅대면서 만들 수 있는 것이 다양성의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필연적으로 뼈아픈 자기 성찰을 동반하지만 그 시간만큼 나는 자라고 있을 것이다. 한국에서 전혀 상상하지도 못했던 방향으로.
11st February 2019
#스웨덴 #개발자 #해외취업